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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를 동여맨 끈

<동행> 겉 그림
 <동행> 겉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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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가 방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9시 뉴스를 보면서 오늘의 행사를 되새겨 보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김대중 :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이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이희호 : "드디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국민들 잘 살게 해 주세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김대중 : "당신도 수고가 많았소."
이희호 :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김대중 : "아니오.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
그가 나의 손을 쥐었다. 긴장된 긴 하루였다. - 이희호 지음 <동행> 323쪽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날, 청와대 안방에서 부부간 나눈 이야기다. 흔히들 한 인물 뒤에는 어머니나 아내가 있다고 한다. 누가 DJ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이희호의 자서전을 덮고서 그 답이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있음을 알았다. 아니 이미 DJ 자신이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라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1954년 처음 정치에 투신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한 번은 후보 등록이 취소되었고,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좌절의 연속이었다.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장면 내각에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 때문에 검거되어 두 차례에 걸쳐 3개월간 구속된 억세게 운이 나쁜 남자였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 <동행> 65쪽

이희호, 서울 사대문 안 부유한 전주 이씨 가문인 의사 이용기씨와 연안 이씨 이순이씨의 6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뒤, 사범대학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하였다. 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수학하고, 스카렛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YWCA연합회 총무를 맡은 재원이었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집안이나 학벌 등 결혼조건이 형평에 맞지 않는,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이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당연히 주위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가족은 물론 친지,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 <동행> 66쪽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존재 이유였다.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 <동행> 68쪽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고 자서전에서 이희호 여사는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였다. 이후 이들 부부의 인생 길이 가시밭임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알 것이다.

"먼 곳에서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홍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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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말

지난 11월 11일,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에 우리 부부가 초대를 받고는 몇 가지 정리를 했다. 학부모 초대에 나선 일이 거의 없었던 아내가 전직 대통령 학부모의 초대에는 응한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기에 나 혼자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은 취재 준비를 하고 가느냐, 그냥 가느냐로 고심하다가 그 모임은 여러 매스컴에서 보도할 건대 초대받은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 취재하는 것이 모양새도 좋지 않을 듯하였다. 그래서 대신 초대장을 받은 소감을 미리 기사로 써서 "한때 학부모였던 이희호 여사의 초대장을 받고"라는 제목으로 송고하고는 그냥 갔다.
   
그날 기념식장에서 김홍걸 군과 그의 고1때 담임이었던 임무정 전 동성중학교 교장 선생과 셋이서 28년 전으로 돌아가 그동안 밀린 정담을 나눴다. 오랜만에 만난 홍걸 군이 그새 표정도 매우 밝아졌고, 사회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듯하여 더없이 반가웠다.

이날 기념식장에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고위직에 오른 사람은 다 모인 듯한데, 내 자리는 4번 테이블 가족석으로 전직 총리급 바로 옆자리였다. 마침 헤드테이블에는 내가 이대부고에 재직할 때 총장이었던 장상씨와 이화학당 이사장이었던 윤후정씨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자리로 가 뒤늦게 이임 인사도 드렸다.

사회자가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에게 건배사를 제의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한 뒤, "한때 사형수의 아들을 위한 건배!"를 제의하자 많은 박수를 받았다.  

"홍걸이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쳐주신 박도 선생님이에요."

"아, 그래요. 정말 반갑습니다."
 "홍걸이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쳐주신 박도 선생님이에요." "아, 그래요. 정말 반갑습니다."
ⓒ 김홍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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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로 몰려와서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인사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후배 작가 유시춘씨, 비서 성인숙씨가 굳이 나와 임 선생을 안내하여 여러 귀빈들이 김대중 이희호 전 대통령 내외분 뵙고자 줄이 늘어선 데도 먼저  인사를 나누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매우 반갑게 맞아주는 등, 아무튼 극진한 예우를 받고 서울을 떠나 강원 산골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홍걸 군이 굳이 기념식장에서 나눠준 <동행> 저서에 어머니의 친필 사인을 받은 뒤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여, 그에게 주고 돌아왔는데 열흘 뒤 내 집에 도착했다. 책을 받은 뒤 목차를 훑고 내 글방 서가에 꽂고는 요즘 집필을 시작한 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여러 날 글을 쓰지 못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서가의 <동행>이 손에 잡혀 꼬박 이틀 동안 읽고는 서평을 쓰고 싶었다.

전직 대통령 학부모라고 더 우대해야 할 까닭도 없지만, 그 반대로 굳이 외면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따금 저자들이 강원 산골 나에게 책을 보내준다. 거기에는 책을 읽은 뒤 서평을 부탁하는 뜻도 담겨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내 양심에 따라 서평을 꽤 여러 편 썼다. 내가 이 <동행>을 읽은 뒤 애초의 뜻을 접고 굳이 서평을 쓰는 까닭은 다음 세 가지다.

그 첫째는 실패를 거듭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둘째는 지아비를 위한 진정한 한 지어미의 정성된 내조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셋째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특히 여성 인권 신장에 이바지한 이희호 여사의 숨은 노고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도 언젠가 김대중 이희호 부부가 당신 집 대문 양편에 나란히 부부의 문패를 달아두고 산다는 보도를 보고, 그때부터 우리 집 대문 기둥에서 내 이름만의 문패를 뗀 뒤 우리 네 식구 이름을 모두 새겨 달았다.

사실 나는 경북 구미 태생으로,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나온 토박이 구미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초등학교 대선배가 된다. 김홍걸 군이 내가 재직하던 학교(이대부고)에 입학할 때는 그 집안이 박 정권과 전 정권에게 핍박받는 가장 어려울 때로, 나는 그들 정권과는 전혀 관계없이 평생 사립학교에서 평교사로 주변머리 없이 내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그때는 마치 내가 가해자라도 되는 양, 그를 대하면 왠지 미안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입에 말린 말로써 위로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죄스러웠고, 수업시간 눈빛이 서로 마주치면 이심전심으로 나의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런 가운데 그가 교내 현상문예공모에 시를 응모한 걸 보았고, 그 시를 읽는 순간 장원으로 뽑아주는 게 사형수의 아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어떤 암묵적인 계시로 그랬다.

이번 출판기념식장에서 만난 비서 성인숙씨, 후배작가 유시춘씨를 통해 "사형수 김대중씨가 옥중에서 아들의 시가 장원에 뽑힌 소식을 전해 받고, 매우 기뻤고 큰 용기를 얻었다"고 그때 사형수가 고백한 심경을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치적과 공과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다만 나는 이 땅의 한 작가로서, 겨레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이 이룬 6·15 남북 공동선언문과 금강산 뱃길을 이은 것만은 지금도, 앞으로도, 누가 뭐래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먼 뒷날 역사가 이를 증명할 것이다.

가장 고독한 모습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드문드문 접어둔 몇 대목을 옮겨 적으면서 이 글을 맺는다.

2명의 폭파범 중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가 재갈이 물려진 채 선거 전날 압송되어 왔다.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노태우 후보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 양 김의 표를 더하면 55%였다.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절망했다. 여론은 두 김씨 중 김대중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었다.

투표 이틀 전 후보 단일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4자 필승론', '승리는 필연'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날 보라매공원의 흥분이 독이 되었던 것이다. 회한에 젖은 그는 "국민들의 염원을 위해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라며 후회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생각이었다. 나 역시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  <동행> 286쪽

김영삼 41%, 김대중 33%, 정주영 16%. 응접실에서 같이 텔레비전 개표 방송을 보던 백경남 교수 일행이 돌아가자 안방으로 갔다. 당사에서 11시쯤 들어온 남편이 쓸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주오."

그의 비장한 결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가 구술하고 나는 받아 적었다.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합니다.  ………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  <동행> 302쪽

강행군을 마치고 5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아직 정상회담 중이라고 했다. 2시간째 계속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 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6시 전에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한동안 배웅하면서 서 있자니 눈가가 젖어왔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나는 얼른 눈가를 훔쳤다.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무섭게 외롭다. 그날의 그가 결혼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 
-  <동행> 340쪽


이희호 자서전 동행 -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이희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08)


태그:#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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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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