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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남편 김대중과 결혼하면서 내 삶은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남편은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

 

밤새 하얗게 눈이 내렸다. 미끄러운 도로를 자동차들이 조심조심 오고가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인다. 아파트 지붕과 거리의 가로수들 머리 위에 쌓인 눈들을 바라보며 한 달 전에 읽었던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라는 부제를 가진 이희호 자서전 <동행>을 다시 읽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처음 책갈피를 펼쳐들기 전에 가졌던 생각이었다. 자서전 하면 대부분 성공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행>이란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한때 사형수였다가 대통령이 되었던 김대중과의 애틋한 사랑담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남편이며 동지였던 김대중과의 만남과 파란만장한 삶

 

그녀가 말하고 있는 동행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한 인간과의 동행이었고, 독재와 싸우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과의 동행이었고, 또 그 과정 속에서 함께 했던 눈물과 기도와의 동행이었다. 해서 그녀는 글을 쓰게 된 연유는 개인의 기록이지만 파란곡절로 아로새겨진 우리 현대사의 뒤안길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말이 아니라도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수많은 그림들이 떠오른다. 향학열에 불탔던 이화여고와 대학시절과 유학생활 중에 만났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와 만남, 김대중과의 만남과 결혼, 그와 함께 하면서 숱한 눈물과 기도로 근 40여 년을 보냈던 암흑과도 같았던 세월의 흑백사진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냈을까?' 하는 경외감마저 든다. 잘 나가던 자신의 삶을 놔두고 한 정치인의 아내가 된 순간부터 암흑의 길을 걸어야했던 이희호 그녀. 어쩌면 그녀의 고통은 개인의 아픔과 슬픔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아픔이요 슬픔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슬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겨자씨보다 작았을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그녀는 눈물 속에서도 남편 김대중이 그랬던 것처럼 희망의 겨자씨를 놓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남편 김대중이 현해탄 바다에서 수장될 운명에 빠졌을 때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수가 되었을 때도 진실이라는 믿음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현실을 무서워했다. 사시의 눈을 뜨고 왜곡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세상이 무서웠다고 말한다.

 

사실 김대중이 수장될 순간에 그를 구출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와 한국 정보 책임자인 도널드 그래그였다고 한다. 두 사람에 의해 김대중은 수장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살아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여당의원(공화당)들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라고 비난을 했고, 같은 야당마저 여당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며 당시의 심정을 술회화고 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줄곧 검은 그림자가 미행해서 숙소를 수시로 옮겼어요. 돈이 떨어져서 기막힌 생활도 했는데…."

 

그녀는 말한다. 당시 자신은 남편 김대중보다 더 힘들고 괴로웠다고. 그래서 비통해하는 남편을 위로할 수 없었다고. 그러면서 그녀는 권력에 비굴해하는 당시 동료 의원들이 불쌍해보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권력의 부당한 범죄에 대항하지 못하는 야당은 이미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내가 받은 가장 귀한 생일 선물

 

많은 사람들을 김대중 하면 과격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언론에서 비춰준 그의 모습 때문이다. 또 독재와 한 번도 타협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놓았던 이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독재를 일삼았던 이들에게 김대중은 제거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온갖 부정적인 것들만 인식시켰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곤 그에 대한 모습은 불온한 자였다.

 

허면 이희호 여사가 바라보는 남편으로서의 김대중과 아버지로서의 김대중은 어떤 모습일까. 유머 있고 자상한 남편이다. 자식들에게도 부끄러운 삶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담금질했던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남편 김대중은 집에 있을 때면 화초를 기르는 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 개를 사람처럼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메모하며 자식들에게도 책읽기를 자주 권했다고 말한다. 그럼 그녀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편 김대중에게 받은 가장 감동적인 선물은 뭘까. 생일날 교도소에서 보내온 카드란다. 이런 내용이다.

 

축 생신.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고난과 헌신에 비추어 특별한 축복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작년 이맘때 홍일이로부터 "어머니 생신을 차리려 해도 아버지가 저러고 계시는데 무슨 생일이냐고 하셔서 집에서 점심 한 끼 잡수시도록 했는데 밥상을 받으신 어머니가 두 손을 모아 오래오래 기도하시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다시 1년이 되었습니다. 나도 요즈음 당신 생각을 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K.D.J 1982.9.23

 

한 달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봉합엽서에 쓴 생일편지 그 하나에도 감동 받은 이희호 여사는 남편과의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남편은 감옥에 끌려갔다. 결혼 10주년에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0주년에는 청주교도소에 갇혔다. 생일 역시 교도소 아니면 연금 중으로 선물은 커녕 미역국도 못 끓일 때가 허다했다. 그렇게 질곡의 삶을 사느라 생일, 기념일을 챙길 여유가 전혀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도소에 보내온 봉합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보내온 생일 편지는 크나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소망하다

 

스스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차별받지 않고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있는 이희호 여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의 사선을 넘나는 고난을 남편 김대중과 겪으면서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아내 이상이었다. 그녀는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김대중과 동지적 관계였다. 또한 김대중에겐 아내이면서 동지이면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책 말미를 통해 자신의 소망을 소박하게 밝혔다. 그것은 남편의 건강도 자식들의 행복도 아니었다. 학창시절부터 여성의 평등에 관심을 두고 행동했던 이력이 묻어나는 소망이었다. 또 남편의 작은 소망도 적어놓았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굳건히 자 ㄹ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척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우리가 그나마 제대로 된 민주주의란 것을 누리고 산 지가 얼마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또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말을 봉쇄하려 하고 글을 봉쇄하려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막기 위해 또 눈물을 흘리려고 한다. 제대로 굴러가는 가 했던 민주주의란 놈은 다시 역주행을 하고 있다. 그 역주행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사람들은 작금의 현실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이희호 여사의 <동행>은 자서전이기 전에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희호 자서전은 총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감정기 시대의 학창시절부터 김대중과 만남, 유신시절과 전두환 정권시절의 암흑, 6월 민주항쟁에서 대통령이 되고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사건이 망라되어 있다. 또하나, 재미난 사실은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계훈제 선생과 있었던 애틋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일부에게 평생을 왜곡된 시각으로 비쳐졌던 김대중을 조금은 진실되게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희호 자서전 동행 -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이희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08)


태그:#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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