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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힘든 때일수록 '가족'의 품이 더 그리워지는 법이죠. 이를 반영하듯 최근 문화계에서도 가족 사랑에 관한 공연이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가족 중에서도 '엄마'는, 그 말 자체가 '무한사랑'과 다르지 않은데요. 여기 도저히 닮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엄마를 둔, 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엄마를 둔 두 딸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편집자말]
한가한 오후, 이런 여유있는 날에도 어머니는 시간맞춰 투석을 해야합니다. 어머니와 함께면 멀리 외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 최순우 옛집 툇마루에서 그림책을 읽는 모녀 삼대 한가한 오후, 이런 여유있는 날에도 어머니는 시간맞춰 투석을 해야합니다. 어머니와 함께면 멀리 외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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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의 몸매는 세 가지다. 동생 임신했을 때 뚱보였던 모습, 엄마의 볼에 살을 비비면 광대뼈 때문에 아플 정도로 말랐던 모습, 복부가 퉁퉁 부어올라 자동차 타이어처럼 부은 요즘 모습. 시간에 따라 변한 엄마의 몸은 다이어트나 요요 현상 때문이 아니다.

막내동생을 임신했을 무렵에는 다리가 퉁퉁 부어 김장할 때 넣는 무 같았다. 오래 전 일이지만 잊히지 않는다. 아이 넷을 낳는 동안 산부인과에 딱 한 번 가봤다는 산동네 아줌마가 임신중독증 따위를 알 리 없었겠지만 짐작컨대 심한 임신중독증을 앓았던 것 같다.

어린 내 기억에도 연이어 딸 셋을 낳은 아내가 네 번째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을 아버지는 달갑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어머니가 직접 쇠고기 한 근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몸 풀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주변 어른들은 "이번에도 딸이면 장손 대를 못 이은 죄로 네 엄마는 쫓겨나는 거야"하고 놀리고는 했었다. 다행히 막내는 사내아이였다. 주변 어른들의 말들을 한꺼번에 혼내주고 싶었다. 엄마가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20분 거리의 큰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숨을 꼴깍거리고 눈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던 날, 엄마는 아이를 낳은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스스로 미역국을 끓여 먹고 피 빨래를 했다.

그 장면들은 오래된 영화처럼 흑백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핏빛만은 붉다. 근처에 사는 아버지의 친인척들은 자기 살기에 바빴고, 친가도 외가도 멀어 할머니들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산후조리가 뭔지 모르던 어린아이였지만 엄마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슬펐다.

아이 낳고 직접 미역국 끓여 드신 엄마

몇 년 후 엄마는 당뇨병에 걸렸다고 했다. 또 몇 년 후에는 입원을 해서 혈당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막내가 유치원에 갈 무렵 엄마는 막내를 낳던 날의 엄마에 비해 절반으로 말라 있었다. 아마 6년 만에 얼굴을 본 친구가 있었다면, 우리 엄마인 줄 못 알아보고 "혹시 아들을 못 낳아서 새 엄마가 들어온 게 아니냐"고 물을 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시작된 엄마의 입퇴원 생활은 점점 주기적으로 변해갔다. 중학생이 되자 가끔은 중환자실로 옮겨가곤 했다. 엄마가 입원해 있을 때면 아버지는 딸 셋의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학교에 보내고, 도시락도 챙겼다.

학교가 끝나고 가면 면회가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간호사들은 몰래 들여보내주곤 했다. 그나마 병원에 갈 수 있는 아이는 첫째인 나와 둘째 동생까지였다. 셋째와 넷째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병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엄마가 동생들이 보고 싶으니 사진이라도 좀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아마 그 해 봄, 엄마는 다시는 병원 문밖을 나설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거 같다.

당뇨는 본인도 괴롭지만 주변 사람도 힘든 병이다. 식습관이 중요한데 한 사람 밥만 따로 하기가 수고스럽기도 하고, 유전적인 요인이나 식생활 요인에 의해 가족들도 걸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잡곡밥을 먹었다. 엄마가 만성신부전을 합병증으로 앓기 전까지.

그 때문인지 나는 기사식당에서 파는 여러 가지 반찬이 나오는 백반을 좋아한다. 가끔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조미료가 왕창 들어간 반찬들을 먹어줘야 집에서 먹는 심심한 환자식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당뇨는 참 까다로운 병이기도 하다. 혈당 조절이 쉽지 않다. 제때 제대로 만들어 먹지 않으면 혈당검사에서 바로 티가 난다. 먹는 것 조절에 항상 신경 써야 한다. 더구나 예민한 성격의 우리 엄마는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혈당 조절이 되지 않는 타입이었다.

해방감이 늘수록 엄마에겐 주사량이 늘어났다

스무살 무렵. 해방감에 귀가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던 나와 일찍 귀가하기를 바라는 엄마가 신경전이라도 벌일라치면 혈당검사기계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200을 조금 넘던 혈당 수치가 400~500으로 마구 널을 뛰어버리면 나는 바로 죄인이 되어야 했다. 내게 주어지는 해방감이 늘어나는 만큼 엄마에게는 주사량이 늘어났다.

끼니 때마다 먹어야 할 알약을 다 합치면 하루에 30개 가까이 되는 약을 먹어야 하는 엄마를 약올리거나 했다가는 온 가족이 괴로운 사태가 벌어졌기에 가족들은 되도록 엄마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애쓰고 살았다. 한 명의 눈치를 살피며 그 사람의 기분을 여럿이 맞춰주는 생활은 생각보다 꽤 피곤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속담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믿고 싶지 않고, 가능하다면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않기를 바란다.

당뇨는 합병증이 무섭다던데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오른쪽 팔다리를 못 쓰기도 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한 덕에, 겉으로 보면 중풍 환자인지 거의 티가 안 날 정도로 회복하셨다. 지금도 힘이 한쪽으로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몸에 균형이 맞지 않아 위험하다. 자주 넘어지고, 자주 부러지신다. 곁에서 누군가 부축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환자이다. 발 관리도 잘 해야 하고, 혈압이나 신장 관리도 신경써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뇌졸중에서 벗어나자마자 만성신부전증을 앓았다. 그때부터 시한부 인생이 시작됐다. 8년 전부터는 복막투석을 시작했는데 의사는 여생을 5년 정도로 내다봤다. 하루 4차례씩 투석약을 배 안에 넣었다 빼야 한다. 새벽 6시, 정오, 오후 6시, 자정. 혈액투석이 아닌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뇨, 뇌졸중, 투석, 골절까지... '종합병원' 어머니

6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을 찾아다녔던 쿠하 엄마는 어쩌면 제 어머니의 30년 전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 할머니와 쿠하 6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을 찾아다녔던 쿠하 엄마는 어쩌면 제 어머니의 30년 전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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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석과 혈당 조절을 해야 했지만 고통을 극복해내자 얼마간은 비교적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지난해에는 대표적인 합병증인 백내장이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안과는 꽤 먼 거리에 있었는데, 치료를 마칠 무렵이던 어느 비오는 날 엄마는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리가 부러졌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부러졌다.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내과만 다니던 환자가 정형외과에 드나들었다. 그렇게 많은 병을 안고 살면서도 골절은 평생 처음 겪으셨다고 한다.

뼈가 붙을 때까지 석 달을 집 안에만 계셔야 했고, 그때부터 다리 힘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빠질 때는 잠깐의 방심도 금물이다. 올 봄에는 계단을 오르다 잠깐의 방심으로 굴러 떨어져 어깨뼈가 으스러지셨다. 악순환이다. 당뇨의 진정한 무서움은 합병증이다. 병의 끝이 없고, 이 병 저 병이 돌아가며 온다.

크게 부서진 뼈 4조각을 이어붙이느라 전신마취를 하셨는데, 몇 달 후 덜 붙은 뼛조각을 재수술하겠다던 담당의는 투석 환자에다가 혈당이 잘 안 잡힌다는 이유로 못 해주겠다고 한다. 불편해도 오른팔을 위로 올리지 말고 참고 사는 게 안전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할 말을 잃었다.

참, 가장 최근에는 폐도 나빠져 드시는 약을 추가했다. 몸 상태는 이렇게 나빠져만 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체력 외적인 것은 더 강해지신다. 해가 갈수록 오기도 늘고, 예감도 정확해진다. 걷기 운동도 포기하지 않는다. 몸이 안 좋다 보니 자식들을 리모컨처럼 여기고 이것저것 지시하셔야 하는데, 그 태도가 점점 당당해져 간다.

막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의 소원은 그 아이가 중학생 될 때까지만 사는 거였는데, 그 소원은 아이와 함께 점점 커져갔다. 막상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고등학교는 훌쩍 건너뛰고 대학생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성모 마리아께 빌었다.

웬걸, 대학생이 되자 제발 군대 다녀오는 것만 보여달라고 애원하더니 제대할 무렵이 되니, 더 바라는 소원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기왕 이렇게 오래 살게 해주신 거 자식들 이름이 박힌 책 한 권 나오는 것 보고 가고 싶다고 기도한다. 이 중환자의 욕심은 살아있는 한 끝이 없다.

중환자의 욕심보다 더 큰 철없는 딸의 바람

100킬로미터 떨어진 지방도시 춘천에서 살고 있는 내가 왕십리에서 앓고 있는 엄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화날 일을 적게 하는 것, 간이 없는 음식을 빛깔 곱게 담아내는 것, 청계천 8가와 9가 사이를 손녀 쿠하와 함께 걷게 해 드리는 것, 쿠하의 그림책을 함께 보는 것, 가끔 서울 곳곳을 산책하러 가는 것 정도가 전부이다.

아버지처럼 새벽 늦게까지 투석 뒷바라지를 할 체력도 없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둘째 딸처럼 엄마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들어 드릴 수도 없다. 살가운 셋째 딸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로 위로를 할 수도, 막내 아들처럼 무거운 엄마를 업고 1층에서 4층까지 올라갈 수도 없다.

대신 난 울기만 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더 울보가 됐다. 말끔한 산후조리원에서 쇠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역국을 먹다가 울고, 드럼 세탁기가 빨아주는 속옷을 널다가도 운다. 5개월짜리 먹이려고 끓이는 미음을 젓다가도 울고,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회용 똥 기저귀를 치우다가도 눈물을 훔친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이 미안해서 울고, 엄마가 온몸으로 겪어낸 세월이 안쓰러워서 운다.

이유식을 처음 먹일 때, 아이는 먹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다. 작은 밥공기로 반쯤 먹이는 데 반 시간도 더 든다. 입 주변에 묻은 이유식을 닦아주다가 또 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도 이렇게 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쌀죽을 닦아내셨겠지.

바라건대, 당신 몸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해 괴로우시겠지만 내 아이들이 가방 메고 학교 가는 모습을 대견하게 봐 주셨으면 좋겠고, 우리 쿠하가 애인을 데리고 와 인사시킬 때까지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내게 해주신 수발을 나도 해드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삼십 몇 년 전, 엄마가 나를 보살피고 키워낸 것처럼 나도 엄마를 살피고 챙겨드릴 기회를 얻고 싶다. 엄마가 내가 떠드리는 이유식 받아 드시고 '똥꽃' 그릴 때까지 버텨주셨으면 좋겠다. 환자 엄마의 거대한 소원보다 철없는 딸의 욕심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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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엄마, #쿠하네, #모녀삼대,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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