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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카페에 내 놓은 중고 물건들. 아이옷부터 책, 사무용 가구, 장난감 등 다양하다. |
ⓒ 최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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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도 한번 올려봐, 정말 잘 팔려."
'잘 판린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경기 불황으로 1000원숍에 이어 500원숍이 생겼다 하고 백화점도 땡처리에 나섰다는데, 지역 카페 '아나바다'에 내놓은 중고 물건이 얼마나 인기가 있을까 싶은데 장난이 아니란다.
이 동생의 경우, 몇 번 안 입고 집에 방치하다시피한 트레이닝복 세 벌을 싸게 내놨더니 하루 만에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좋아라 했다. 급 팔랑이는 아줌마의 귀, 그럼 나도 한번 해봐?
팔기는 아깝고, 입자니 나이가...동생이 말한 지역카페 아나바다에 접속해봤다. 애들 옷부터 장난감·가전·도서 등을 싼 값에 파는 것은 물론이고, 공짜로 준다는 물건까지 하루 70여건의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뭐 이런 걸 판다고 하나 싶은 것도 있고, 이거 잡은 사람은 횡재했겠구나 싶은 '왕건이'도 있었다.
'그래, 나도 팔아보는 거야.'옷가지들이 잔뜩 쌓여있는 방을 보며 '저걸 언제 정리하나' 한숨만 나왔는데, 돈에 눈이 멀자 '정'리 앞에서 늘 느려지던 내 손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분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눴다. 입을 것, 팔 것, 버릴 것. 버릴 것은 누가 봐도 버릴 만한 것들이었는데, 고민은 입을 것과 팔 것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아, 이건 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팔기는 좀 아깝다. 근데 몇년간 한 번도 안 입었고 올해도 안 입을 거잖아. 아, 그리고 이건 정말 거의 새 건데 이 나이에 입기는 좀 그렇고, 그래도 교복 입는 애들이 입으면 딱인데….'
그런데 가만 보니 중고 물품도 팔리는 것만 팔린다. 게시글에 개성이 없으면 몇 사람에게 읽히지도 못하고, 최근 리스트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벼룩에도 전략이 필요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내린 전략은 이랬다. '미는 상품' 한 개를 사면, 두 개의 옷을 덤으로 주는 패키지 판매.
사실 하나하나 팔기는 시간도 여유롭지 않고, 큼직한 것만 제값 주고 팔면 그 나머지 것들은 꼭 팔지 않아도 되는 고만고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1+1' 혹은 '1+2' 행사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건 게시글 제목. 많은 사람이 봐야 잘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일.
'엄마 옷 메인 사시면, 덤도 드려요'예상은 적중했다. 순식간에 조회수는 백단위를 넘었다. 밤 12시를 넘기기 전, 하나의 물건이 낙찰됐다. 내가 가장 아꼈던 원피스. 정말 거저 가져가는 단돈 1만5천원(5만원 정도에 사서 두어번 정도 입었다)에, 홈웨어 원피스(한 번 입었다) 1개 덤. 이 고객(?)과의 거래는 단 몇분 만에 흔쾌히 이뤄졌다.
게시글에 분명 '에누리는 하지 않아요'라고 밝혔는데, 말이라도 한 번 '에누리 안 되나요?'해주시는 센스. 그래, 그 맘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 원피스는 정말 에누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맘 알기에 그냥 '서비스 물건 하나 드릴게요' 하고 말았다. 쇼핑백에 물건을 담으며 일회용 원두 티백을 넣었다. 짧은 메모와 함께.
다음날 이 물건은 곱게 전해졌다. 문제는,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 그 다음 고객이었다.
"잔돈 없는데, 그냥 만원에..."다음 날 아침, 두번째로 옷을 사겠다는 고객의 문자가 전달됐다.
'빨간 코드 팔렸나요? 아이 사주고 싶은데, 덤으로 주는 옷 필요없으니 만원에 안 되나요?'천원 에누리도 아니고, 오천원이나 깎아달라는 이 대범한 아주머니는 누구? 문자 메시지 교환이 원활하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만원은 안될 것 같아요.""덤으로 주는 옷들 필요없는데, 그거 빼면 만원에 되지 않나요? "그것들도 다 단품으로 팔 수 있는 것들인데, 제가 시간도 여의치 않고 해서 그냥 메인 하시면 드리는 거예요. 공짜로 그냥 드리는 건 아녜요.""그럼 위에 메인 옷에 있는 덤으로 주세요. 이 덤들은 불필요해요.""위에 거 하시겠다는 분 아직 없으니, 그렇게 할게요. 그럼 만오천원….""그냥 만삼천원에 해주세요.""네? (아, 속으로 진짜 갈등 많이 했다) 그러세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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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절당한 비운의 주인공, 빨간코트. 아직도 날아갈 듯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있는 너를 단 돈 '만원'에 가져가려 했던 고객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
ⓒ 최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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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안 입을 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근데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물건 찜했다가 연락없이 잠수타는 사람, 당장이라도 살 것처럼 들이닥쳐 놓고 이것저것 '진상' 짓만 하다 돌아간 사람, 불량 물건 벼룩으로 내 논 사람, 싸게 산 거 더 비싼 값에 파는 사람 등등 황당한 벼룩 사례를 몇 번 접한 탓에 이 고객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그리고 스치듯 떠오르는 동생의 말.
"언니 있지. 내가 물건 올릴 때 분명히 에누리 안 된다고 했는데, 만나서는 두 개 샀으니까 좀 깎아달라고 하는 거 있지?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2천원씩 4천원 깎았잖아, 좀 아까웠어."불길한 기분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지만 약속된 시간, 그 분이 오셨다. 유유히 차를 끌고. 그날 따라 바람이 너무 불고 추워 운전석 옆자리에서 거래(?)가 이뤄졌다. 쇼핑백에서 꺼낸 옷을 보시면서 이 고객, 대번에 하시는 말씀,
"드라이크리닝 하셨나요?""네? …아뇨. 그러진 않았어요. 근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깨끗하고, 세탁하고 몇년 안 입었던 옷이라,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덤으로 드리는….""네…. 사실 이런 건 필요없는데 그냥 만원으로 깎아주시면 안되요?"아, 혹시나 예상은 했지만 이 밀려드는 절망감이란. 황당스럽다는 내 표정을 읽으신 건지, 아주머니 지갑에서 말없이 돈을 꺼내신다. 보이는 돈은 배춧잎 두 장.
"잔돈 없으세요? 저 잔돈 없는데.""저도 없는데, 어떡하죠? 요 앞에 은행 있으니까...""아… 어떡하지, 잠깐만요. 요 옷가게에서 잔돈 바꿔 볼게요.""그냥 만원에 하시지…."아, 이 고객 마지막 말씀에 제대로 질렸다. 초지일관 빈틈없는 일관성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순간 잔돈 거슬러 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됐어요. 아주머니에게 안 팔래요."그깟 돈 몇푼보다 더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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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진작 기부할 생각을 못했을까. 몇 푼 안 되는 돈에 잠시 눈 먼 나, 부끄럽기 짝이 없다. |
ⓒ 최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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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중고 물건을 팔려던 내가 잘못이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액수를 벌겠다고, 불필요한 흥정에, 사람에 대한 배신과 그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까지 이 모든 걸 어디서 보상받냐는 말이다.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오는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세상에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차까지 끌고온 마당에 기름값은 안 아까우신가. 그럴 거면 그냥 새 옷으로 사주시지. 뭐하러 중고를 사시려고 하는지 모르겠어."나는 어느새 동생에서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이라 동생의 심심한 위로를 받으며 내가 향한 곳은 집 앞 '아름다운 가게'였다. 기부물품 인수증을 간단히 작성하고 6개의 의류를 기증했다.
"오늘은 옷 기부하는 분들이 많네요."얼굴이 빨개졌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던 걸까. 돈 몇 푼에 눈이 멀었던 내 모습이 참, 부끄러웠다. 지난 여름, 나도 여기서 맘에 드는 옷을 정가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금액에 사서 기분 좋았는데…. 아가(?)들아. 너희를 고작 몇 푼의 돈에 팔아먹으려 했던 나를 용서하고, 부디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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