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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들수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론 원하는 사람도 만나지만 원치 않는 사람과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딱히 정해 놓은 틀이 아니더라도 길을 가다 우연히 스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은 만남보다 그저 지나가다 만나는 자연스러움이 훨씬 좋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사는 마천동 남한산성 자락 아래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쳐갑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 아이를 비롯하여, 서로 다른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경쟁하듯 뛰어가는 아이들, 꽉 낀 교복 차림에 멀대같은 키를 자랑하며 삼삼오오 걸어가는 중고등학교 학생들, 버려진 종이를 모으려 힘들게 발품을 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리고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는 많은 여행객들이 그렇습니다.

 

아이들과 학생들, 어른들과 여행자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흡사 천만 개의 꽃을 보는 듯합니다. 그 속에서 나름대로 지닌 삶의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지함과 소박함, 겸손함과 순수함, 고립과 냉대, 가난과 병듦, 절망과 분노 등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뭔가를 읽어보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도무지 막을 길이 없습니다.

 

'달팽이 사진가'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임종진의 <천만 개의 사람꽃>은 십수 년 전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길을 걸으면서 만난 길 위의 사람들과 그들의 몸짓을 담아낸 사진 작품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요즘같이 재빠르게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사진도 있지만 달팽이처럼 아주 느리게 셔터를 눌러 찍은 필름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사진작품 옆에는 그에 걸맞은 생각과 느낌을 담은 시와 수필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길을 걸을 때나 어디에서나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곤 합니다. 낯선 그들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고단한 일상과 여정을 보기도 하고, 사이사이에 머문 기쁨과 슬픔, 고요와 흥분, 그리고 평온과 번민의 단상들을 읽습니다. 헛스런 관음의 시선이 아닌, 어느 타인이 가진 가치에 대한 이해와 앎을 위한 시선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바라보기를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프롤로그)

 

그렇듯 사진과 글을 한 땀 한 땀 조화롭게 수놓고 있는 이 책에는 이라크 석유의 최대 매장지인 남부 바스라 지역의 한 병원에서 선천성 백혈병으로 앓아누운 어린 아이의 슬픈 눈망울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칠갑산 자락 아래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얼굴 속에서는 수몰 지역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터를 찾아 떠나야 하는 수심 가득한 모습도 읽게 됩니다.

 

또한 인구의 26%인 3억명이 하루 1달러의 수입으로 살아간다는 인도 한 할머니의 맨발과 발톱에서는 삶의 고단함과 시린 연민의 정을 새길 수 있습니다. 전남 나주의 시골 총각에게 시집와 타향의 설움과 외로움을 달랜 채 농사꾼의 아내로 거듭나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아내의 웃음 가득한 행복도 한 껏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일상을 살면서 스쳐지나가는 얼굴과 형편은 남의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때때로 '나와 다름없는 그'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드라마의 연속극이 마치 내 삶을 보여주는 것 마냥, 똑같은 내 삶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엿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서로의 경계와 구분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됩니다.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여러 사진과 글들도 그러한 경계와 구분을 허물어트리는 의사소통의 프레임이 됩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그리고 먼 훗날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되짚거나 내다볼 수 있으니 천만 개의 얼굴 생김새야말로 어쩌면 나의 실체를 비춰주는 참 거울로 다가오지 않나 싶습니다.


천만 개의 사람꽃 - 임종진의 삶 사람 바라보기

임종진 지음, 넥서스BOOKS(2008)


태그:#천만 개의 사람꽃,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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