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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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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남장 연기로 화제가 되고 있는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였던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의 삶과 그림 세계를 그린 사극이다. 화가와 그림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는 원작의 탄탄함과 배우들의 호연, 뛰어난 연출력 3박자를 두루 갖춘 작품으로 '명품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국내 미술사학계의 대표적 권위자이자 안휘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심각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왜곡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극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역사왜곡 논쟁은 연례행사처럼 한두 차례씩 있었지만 문화재위원장 정도의 권위자가 특정 사극을 꼬집어 비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실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혜원 신윤복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세 가지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① 만약 신윤복이 여자였다면? ② '여자'인 신윤복과 김홍도가 서로 알고 지냈다면? ③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면? 여기서 안휘준 위원장은 '신윤복은 명백한 남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첫 번째 가정과 세 번째 가정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윤복의 그림과 일부 문헌의 행적 기록을 통해 그가 남자였다는 게 분명한데도 작가가 극의 재미를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가정은 어떨까? 동시대를 풍미한 두 천재화가, 혹시 서로 친분이 있진 않았을까?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한 결과, 정조 시대에 '신윤복'이란 인물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김홍도'는 3회에 걸쳐 실록에 등장했다. 그 중 첫 번째 내용이 아래와 같다.

"…이어 화사(畵師)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김홍도(金弘道)에게 각기 1본씩 모사(摸寫)하라고 명하였다." - 정조 12권, 5년(1781 신축/청 건륭(乾隆) 46년) 8월 26일(병신) 1번째 기사

정조가 어진 1본을 규장각에 봉안하기 위해 화사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에게 각기 1본씩 모사하라고 명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한평'이라는 이름이다. 신한평은 20세기 초 오세창이 쓴 <근역서화징>에서 신윤복의 아버지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김홍도와 신한평이 어진을 모사할 명을 같이 받았을 정도라면 둘 사이에 친분이 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그 신한평의 자식인 신윤복 역시 알았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아마 작가는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바람의 화원>이라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 한 편이 완성된 것이 아닐까?

사극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역사왜곡'... 이유는 있다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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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브라운관에 사극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그 중심에는 역사적 사실과 실존인물이라는 최소한의 밑바탕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는 팩션(faction)형 사극이 자리 잡았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기존의 정통사극과 달리 팩션사극은 역사 속에 현대적 감각과 재해석을 무리 없이 덧씌울 수 있어, 트렌디 드라마를 즐겨 보는 젊은 시청자 층과 기존의 정통사극을 즐겨보는 장년층까지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모아 안정된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팩션사극에는 항상 역사왜곡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팩션사극에 역사왜곡 논쟁이 빠질 수 없는 이유는, 첫째로 역사적 고증에 필요한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몽>이나 <바람의 나라> <태왕사신기>같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를 그린 사극은 연대가 높아 사료가 유실되거나 혹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고증에 필요한 사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또 연대가 비교적 가까운 조선시대를 그린다고 해도 의녀(대장금), 기생(황진이), 내시(왕과 나), 화원(바람의 화원)같이 당대에 주목받지 못했던, 천대받던 직업을 가진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의 경우 마찬가지로 만족할 만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신윤복조차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이름 석 자를 찾아볼 수 없고,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두 줄의 기록이 유일하다 할 정도이니 말이다.

둘째로는 극적 구성과 흥미 유발에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는 모두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독자(혹은 시청자)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하게 만들고 그것에 빠져들게 해야 하는데, 기존의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히 재미있지 못하다. 그래서 작가는 역사를 꼬거나 비틀어서, 혹은 상상력을 더해 허구적 사건이나 인물을 창조해 끼워 넣으면서 극에 재미를 더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 증폭, 긍정적 영향 아닐까

예컨대 <이산>에서 의빈 성씨가 도화서 다모가 아니었다면 정조를 도와 그림과 관련한 음모와 사건에서 실마리를 찾아 해결할 수 있었을까? <허준>에서 스승 유의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런 감동과 재미가 있었을까? <왕과 나>에서 처선과 폐비 윤씨의 애끓는 로맨스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 작품이 시청자의 흥미를 끌었을까?

바로 이런 장치들이 시청자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평범한 양반가문의 여식인 의빈 성씨를 도화서 다모로 둔갑시키고, 허준보다 150년이나 후대의 인물인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만들고, 처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폐비 윤씨를 그의 또래로 만든 것이다.

이런 사극의 역사왜곡은 대중에게 잘못된 사실을 마치 진실인양 전달해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사극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대중에게 역사 알리기' 측면에서 실존했던 인물의 성별까지 바꾸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사극이라는 드라마가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꼭 나쁜 면만 있을까? <바람의 화원>의 역사왜곡은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있다. 미술사학계의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자인 신윤복을 여자로 둔갑시켜 시청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고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할 위험을 지닌 것이 부정적인 효과일 수 있겠다. 반면 김홍도만큼이나 빼어난 그림을 남겼음에도 크게 조명 받지 못했던 신윤복을 재조명함과 동시에 그의 풍속화를 대중에 널리 알리면서 신윤복과 풍속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것이야말로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미인도> 있는 간송미술관 찾은 이유

<바람의 화원>과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는 KBS <바람의 나라>와 관련해서도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었다.
 <바람의 화원>과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는 KBS <바람의 나라>와 관련해서도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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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자의 부정적인 효과는 얼마든지 교정이 가능하다. 바로 '교육'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미술 수업시간이나 혹은 국사 수업시간에 교사들이 <바람의 화원>을 화제로 해 신윤복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오히려 유행하는 드라마를 화제로 함으로써 학생들의 적극적인 수업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신윤복이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그런 내용을 말할 수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시청자는 '드라마는 허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반면에 후자의 긍정적인 효과는 <바람의 화원>이 아니라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동양화나 풍속화가 대체 어떤 것이며, 신윤복이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인지, 뭘 그렸는지 사람들이 관심이나 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온라인에서는 신윤복 신드롬이 불고 있고, 그 기세를 타고 오프라인에서도 그 열기가 커지고 있다. 신윤복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회는 2주 만에 수십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바람의 화원>의 힘이다.

안휘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은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신윤복의 <미인도>앞에서 젊은이들이 "혜원이 진짜 여자래"하고 수군거리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미인도> 옆에 '사실 신윤복은 남자였다'는 내용이 담긴 팻말이라도 하나 세워놓았다면(너무 뜬금없을까요?) 그 젊은이들은 그림 감상과 함께 정확한 역사적 사실까지 배우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역사왜곡에만 초점을 맞추고 '하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그 역사왜곡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를 누리면서 부정적 효과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세우는 게 더 바람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휘준 위원장님께 묻고 싶은 것 한 가지.

"<바람의 화원>이 없었더라면, 과연 젊은이들이 <미인도>를 보러 간송미술관까지 왔을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mhchoi.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역사왜곡, #바람의화원, #팩션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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