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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를 위하여 '책'을 읽는 나라가 우리나라 외에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입시 때문에 책을 읽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막상 대학가 근처에는 변변한 서점 하나 없다. 책을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다는 대학 시절에 전공 서적과 영어책 외에는 달리 읽지 않는 안타까움이 벌어지고 있다.

 

읽는다고 해도 자기 개발서와 주식투자 같은, 자본주의에 철저히 물들게 하는 책만을 읽는 인문학 빈곤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출판사들은 인문학 빈곤 시대를 거부하고 일명 '양서'를 펴내기는 버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읽을만한 책은 있다. 인터넷 서점 첫화면을 장식한 책, 마일리지와 경품으로 유혹하는 책이 아닌 깊이 있는 책들은 발품과 손품을 잘 팔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 시리즈가 그 중 하나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미숙씨가 지은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이다. 그는 독일문학을 전공하였으나, 대학교 4학년 때 고전문학을 가르쳤던 스승에 매료되어 한국 고전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일단 돈 안 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하여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역사와 실천, 삶과 혁명, 혁명과 구도 따위 삶을 걸었고,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 <18세기에서 20세기 초 한국 시가사의 구도> <비평기계> 따위를 펴냈다.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는 180쪽에 불과하지만 인문학 빈곤 시대에 읽을 만한 책이다. 하지만 '근대성'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은 딱딱할 뿐만 아니라 부제인 '민족 · 섹슈얼리티 · 병리학'은 책을 들고 싶은 마음을 더욱 없애준다.  

 

하지만 한국 근대성에 대한 접근 방식을 '민족 · 섹슈얼리티 · 병리학'에서 찾아가는 방법론은 색다른 접근이므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의 근대성은 이론이나 운동사를 중심으로 논의해 왔기 때문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근대화론이라는 이론이 아니라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일어났던 근대가 태동하는 현장에서 근대 기원을 찾고있다. 그는 이 시기를 근대계몽기로 정의하는데 1894년 청일전쟁, 갑오농민 전쟁, 갑오개혁에서 1910년 일제병탄까지이다.

 

그는 이 시기를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초라한 어둠과 절망만 존재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후 100년간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피끓는 열정'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시기는 우리 근대가 시작된 '기원의 공간'이라 말한다.

 

"중세 봉건 체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다는 거시 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유체계와 삶의 방식, 규율과 습속 등 구성원 개개인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차원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형성된 지층들은 20세기를 관통하여 굳건하게 지속, 심화되어 왔다."(11쪽)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을 고조선부터 조선시대를 지나 지금 한일 축구 경기만 벌어지면 열광하는 모습처럼 아주 오래된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근대 계몽기에 나타난 담론이다. 고미숙은 우리에게 민족이 절대 개념처럼 자리 잡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대 계몽기의 담론에서 군주에 대한 미련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5백여년간 한 왕조가 통치했음에도 그토록 흡인력이 미미할 수 있는지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달리 보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이름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이란 기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민족이란 표상이 이전에 이런 저런 기호 속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흡인하게 되었다. 민족은 어떤 개념보다도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그것은 시대의 절대적 명제로, 지고지순한 가치로 떠오르게 되었다."(33쪽)

 

민족이란 개념은 이렇게 우리 의식을 자리한 뒤 일제의 탄압을 겪어내며 절대 개념이 되었다. 21세기 사이버와 첨단 시대를 관통하는 이 시점에도 큰 변화는 없을 정도. 이념 논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 '민족주의'는 모든 이념에서 '지존'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 고미숙 주장이다.

 

2장 '섹슈얼리티'를 보자. <동방견문록>이나 <고려사>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문화와 너무 달라 충격이다. 마르코폴로 눈에 비친 원나라 유목민 여성들은 남성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목걸이를 걸었는데 목걸이가 많을수록 여성의 주가가 올라간다, 티베트의 고원지대에서는 손님이 오면 아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 고려 왕조는 근친결혼을 했고, 여성 재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불륜도 이런 불륜이 없지만 고려 시대 때는 이것이 왕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화였다. 이것이 근대를 지나면서 일부일처제와 같은 성규범에 대한 절대적인 개념으로 변화해 우리 신체와 의식에 자리잡았다는 게 고미숙의 주장이다.

 

아직 여성은 성 주체로 완전히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다. 정결과 타락, 사랑과 민족, 아내와 매음녀, 도덕과 포르노그라피로 가로지르는 이분법의 구도에 긴박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개인과 사회 속에 있는 자연스럽고 생명력 있는 힘들은 자연스러운 생명성의 자발적인 기능작용에 반하여 작용되는 모든 장애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이란 '사랑, 일 그리고 지식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최손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123쪽)

덧붙이는 글 |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고미숙 지음 ㅣ 책세상 ㅣ 4,900원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고미숙 지음, 책세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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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근대성,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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