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격투기 얘기를 해볼까 한다. 요즘 유행하는 이종격투기를 비롯해서 권투나 레슬링·유도·태권도와 같은 올림픽 종목까지 거의 모든 격투기는 체급을 나누어 시합을 펼치고 있다. 체급이란 곧 체중 차이를 말하고 이는 곧 신장의 차이, 골격의 차이, 힘의 차이로 이어지기 때문에 격투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 번째 문제. 권투 시합에서 헤비급과 라이트급이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코웃음 칠 게다. "에이~ 이보쇼,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헤비급한테 라이트급이 상대가 돼? 체급이 다른데."

 

분명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체급 차이가 나는 선수끼리는 시합을 할 수 없다는 건 격투기에 있어서 상식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시합 전에 계체를 하고 여기서 중량 제한에 0.1㎏이라도 부족하거나 넘치면 경기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두번째 문제. 왜 체급 차이가 나는 선수끼린 시합을 할 수 없는 걸까? 답은 오직 한 가지. 공정한 시합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시합도 하기 전에 승패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근육·훈련의 양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운 타고난 기본적인 힘의 차이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 우리나라 교육계

 

그런데 이런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 바로 교육계다. 올 7월 직선제에 의해 당선된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은 고교선택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고교선택제란 현행의 추첨제인 고교입학 방식을 지원제로 바꿔 학생에게 자신이 다닐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제도를 말한다.

 

언뜻 보기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 사실 나쁘다고만 할 수 없기도 하다. 지금까지 학생들은 자의에 관계없이 추첨에 의해 자신이 다닐 학교를 배정받았고, 학생 본인에게 학교 선택의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 추첨제의 문제점과 한계는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고교선택제 문제의 본질은 제도의 성질에 있지 않다. 시행 시기와 의도에 있다. 공정택 교육감은 2010년부터 고교선택제를 시행하고, 지원율이 낮아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학교에 대해 행정·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지원을 받고 일정기간이 지난 뒤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학교의 경우 학급감축 등의 제재를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폐교조치 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학생들이 학교를 지원하는데 가장 많이 참고할 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대입성적이다. 서울대 입학생 숫자로 학교의 급이 나눠지는 현실 속에서, 대입성적이 좋은 학교에 학생들의 지원이 몰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들이 특목고에 대거 지원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대학 잘 보내기로 소문난 소수의 명문고에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몰릴 것이고, 더 많이 입학하게 될 것이다. 몇 개의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독점하는 현상, 잘하는 학교는 더 잘하게 되고 못하는 학교는 더 못하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교육계 버전이 이제 곧 펼쳐지게 될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학교와 학생·학부모, 모두 괴롭다

 

 

공정택 교육감은 경쟁을 통한 경쟁력 향상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경쟁의 실체는 체급이 맞지도 않은 헤비급과 라이트급 선수들을 붙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링에 오른 명문고 선수와 하위고 선수가 시합을 시작한다. 체급에서 몇 단계나 차이가 나는 이 두 선수 간의 시합은 명문고 선수의 싱거운 1라운드 K.O 승리로 끝난다. 공정택 교육감은 시합에 진 하위고 선수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하위고 선수는 명문고 선수에게 죽도록 얻어맞아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先)경쟁 후(後)지원이 되어선 안 된다. 선(先)지원 후(後)경쟁의 체제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고교선택제를 시행할 게 아니라 현행의 자료를 토대로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학교와 학군에 행정·재정적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 충분한 지원과 노력으로 낙후된 공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공정택 교육감은 모의배정 결과에서 비선호학교가 될 가능성이 높게 나온 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는 한 두 해의 시간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총 3단계로 나뉘는 지원제에서 학생들은 1·2단계에 걸쳐 전부 4개 학교에 지원할 수 있게 된다. 2단계에서도 지원한 학교에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은 3단계에서 강제 배정을 받게 되는데, 지원율이 낮아 정원을 충족하지 못하는 학교는 이 강제 배정을 통해 정원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지원율이 낮은 학교=하위고'라는 인식 속에서, 교육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당하거나 폐교 처리되지 않기 위해 학교 측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만 한다. 대입성적이라는 불을 말이다.

 

학교는 0교시와 방과 후 보충수업을 늘리고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화한다. 학생들은 1학년부터 가혹한 입시경쟁에 내몰린다. 비단 하위고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명문고는 명문고 나름대로 우수한 대입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상위권 학생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지금보다 더 빡빡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교사는 교사대로 지치고,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힘들고, 학생은 학생대로 괴롭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교고선택제, 개혁 아닌 개악

 

경쟁을 통해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게 하겠다는 목표도 다소 허황된 감이 있다. 무한경쟁 시스템 안에서 사교육은 결코 수그러들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잘못된 경쟁의 틀 안에서 공교육의 질이 향상된다는 주장도 미심쩍거니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집 아이보다 조금 더 가르치고자 하는 학부모의 욕심, 다른 학교보다 대입성적이 좋아야 하는 학교의 욕심은 결코 사라질 수 없고, 무엇보다 사교육의 힘이 크게 작용할 수 있는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공정택 교육감은 미셸 리 워싱턴D.C. 교육감의 개혁을 예로 들며 자신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이 둘의 개혁은 그 본질이 엄연히 다르다.

 

흑인·히스패닉의 인구비율이 높은 워싱턴D.C.는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지 못하는 기능적 문맹인구가 2007년 기준 1/3수준으로 미국 전체 평균을 웃돌고, 학생들의 기본적인 읽기·수학 능력에서 인종간, 공·사립학교 간의 격차가 매우 큰 곳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 고교생의 읽기, 수학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OECD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연구결과)으로, 모든 학생이 기본적인 공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워싱턴D.C.와는 거리가 있다.

 

즉, 미셸 리 교육감이 말한 교육격차 해소가 읽고 쓰고,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계산할 줄 아는 기본적인 지적 성장의 불평등 해소였다면, 공정택 교육감이 말한 교육격차 해소란 명문대 많이 보내는 강남과 그렇지 못한 비(非)강남의 대입성적 불평등 해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셸 리 교육감이 소외계층과 소수민족의 교육 불평등에 대한 개혁을 외칠 때, 공정택 교육감은 국제중 신설과 특목고·자사고 확충으로 소수 상위권 학생들의 교육 여건에 대한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공정택 교육감은 고교선택제 시행 후 비선호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 번 낙인이 찍힌 학교가 다시 회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가슴 속에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은 찍히고 만다. 학교와 교사, 학생과 학부모 모두 보이지 않는 낙인을 떨쳐내기 위해 전력투구할 게다. 누구를 위한 고교선택제인가? 이는 개혁(改革)이 아닌 개악(改惡)이다.

 

[최근주요기사]
☞ "IMF 때로 돌아가나?"... 투자자들 망연자실
☞ 헤비급-라이트급 싸움 붙이는 공정택
☞ "반값으로 내려도 등록금 문제 해결 안 된다"
☞ 쌀 직불금 "잣대" 바꾼 홍준표


태그:#고교선택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