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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입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글에 녹아있는 '유머'와 '해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에 관해 논할 때, 성석제를 빼놓고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석제의 글에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인생의 단맛만큼이나 가슴을 파고드는 '쓴맛'을 내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 나온 단편집 <지금 행복해>는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 '여행'은 세 명의 친구가 무전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젊은이들의 무전여행이라고 하니 뭔가 설레는 일이 생길 것도 같지만, 그런 일은 없다. 밭에서 먹은 음식 때문에 설사하고 돈 없어 당하는 서러움만 가득하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이 걸어간다. 하지만 부유층을 만나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하게 되고 결국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고 만다. 그런데 그것은 부유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이내 서로에 대한 미움을 공개적으로 털어놓으며 각자 갈 길 가자고 선언한다. 알뜰살뜰한 재미를 줄 것처럼 시작했건만 소설은 현실적인 모습을 한껏 반영하면서 온갖 '행태'를 보여줘 기어코 독자들의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여행 이야기가 소재인 또 다른 소설 '피서지에서 생긴 일'도 마찬가지다. 시골의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도도한 여대생과 함께 피서를 간다. 주인공은 뭔가 일을 벌여보려고 하지만 벌어지는 일은 엉망진창이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추태를 보일 때 웬 건전한 대학생들이 와서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다. 숲속에서 그녀와 뽀뽀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주인공, 그 울적한 심사가 남다르게 여겨지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추억을 자극하기에 결국 쓴웃음이 나오고 만다.

 

이런 풍경은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재능을 지녔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림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소년은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그림도 잘 그리는 소녀를 본다. 어느 대회에서였다. 소년은 소녀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결과는 소년의 승리였다. 소년은 기뻐 날뛴다. 그런데 막상 수상작을 보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짐작한다. 소녀도 이 결과를 알고 있을까? 소녀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소년에게 절박했던 그 승리가 소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모른 채 소년은 전전긍긍한다. 묘하게 대비되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그린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은 소설로 느낄 수 있는 쓴맛의 강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그 정도가 심해 성석제가 얄미울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성석제의 소설이기에 맛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쓴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해독해주는 사탕도 있다. '기적처럼'이 대표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살기 싫다. 집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바람 따라 등산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죽을 것이 뻔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때에 잔소리꾼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어머니는 여전히 잔소리만 한다. 마지막 순간치고는 참 멋없는데, 무슨 우연인지 주인공은 살아난다. 정말 '기적처럼' 살아나는데 소설이 건네는 말이 반갑다. 소설이 재밌기도 하지만 글자 사이에 숨겨진 의식, 즉 그래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풍경은 확실히 즐겁다.

 

표제작 '지금 행복해'는 어떨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벌이는 이야기는 달콤하면서도 살벌하다. 철없이 아들에게 친구하자는 아버지, 아버지를 무시하는 아들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눈물 중독자가 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그 모습이 애틋하기만 하다. 성석제 소설의 따뜻한 맛이 물씬 풍기는 순간이다.

 

<지금 행복해>는 예전의 성석제 소설에 비하면 특유의 유머와 해학은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네 사람들의 쓴맛, 단맛, 따뜻한 맛이 소설로 그려지는데 그 비율이 전주비빔밥의 양념처럼 절묘하다. 성석제라는 이름에서 낭만을, 혹은 아련한 추억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 번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행복해

성석제 지음, 창비(2008)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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