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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그다지 큰 감동은 없었습니다. 물론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다는 자부심과 힘겨운 노동은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은 있었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할 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습니다. 예상 정도의 풍경과 거기에 걸맞는 느낌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왕봉에서 장터목산장으로 가는 길에 어떤 문을 지났는데, 바위로 된 그 문의 이름이 참 특이하더군요. 하늘로 통한다는 뜻의 '통천문' 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문을 통과하고부터 정말 이상한 기분에 빠졌습니다. 신선의 행복을 조금 맛본 것이지요.

 

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

 

우리가 신선의 세계를 맛본 그 봉우리 이름이 제석봉입니다. 고사목지대더군요. 지금까지  본 경치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 자체의 경치도 훌륭했지만 가장 좋은 시간에 당도한 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렌지 빛 노을이 하늘 가득 물들이는 시간에 우리는 제석봉에 도착했습니다. 자연이 주는 감동이 대단했습니다.

 

"그 아저씨가 자부심을 가질만하네. 다른 산하고는 달라. 이런 게 지리산의 묘미인가 봐.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신선의 세계에 온 것 같아."

 

매우 고양된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시간이 있습니다. 박목월의  '강촌'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그네가 어느 강촌 마을에 갔다가 그 마을에 사는 과부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처자가 있는 나그네는 쓸쓸하게 발길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가 햇빛이 이글거리는 한낮에 마침 그곳에 도착하고 그 과부를 봤다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그네가 도착한 시간은 우리 가족이 제석봉에 도착한 시간처럼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운 그 시간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시간에는 감성적으로 변해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그네도 오렌지 빛 하늘을 배경으로 물을 긷고 있던 아낙에게 한순간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지리산을 50번쯤 오를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나는 지리산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내가 도착한 그 특별한 시간 난 지리산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사랑이란 게 특별한 게 아니고 이런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의 마술이라고 봤을 때 이제 난 지리산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맛본 천상의 경험에 매료돼 어떤 아저씨처럼 지리산을 50번쯤 찾게 될 것 같네요.

 

 

제석봉은  나무의 키가 참 작습니다. 그리고 회색 속살을 드러내며 죽어 있는 나무도 꽤 보였습니다. 산이 너무 높아 나무가 생존하기에 어려운 환경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50년 전에 벌목꾼들이 지리산에서 나무를 베고 그 흔적을 지우려고 불을 질렀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가 울창했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더군요. 나무가 있었을 때의 이곳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정말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생각과 또 사람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도 그렇지 자기의 작은 욕심 때문에 민족의 보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산을 홀랑 다 태워버렸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안타까움이 교차했습니다.

 

신선의 세계를 맛본 우리는 모두 들떴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가벼운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남편도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작은 애는 마침내 목청을 길게 빼고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우리 둘째는 목소리가 걸걸해서 판소리에 알맞은 목소리라고 하는데, 학교에서 민요를 한 번 배우더니 곧잘 불러서 내가 불러달라고 졸랐거든요.

 

흥겹게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는 어느덧 장터목산장에 다 왔습니다. 장터목산장이 저만치 보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아련하게 들려올 때 확성기를 통해 안내방송을 들었습니다.

 

"예약을 안 하고 올라오신 분은 매표창구로 모이십시오."

 

중산리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과 달리 장터목산장에서는 온정을 베풀었습니다. 방을 예약 안하고 올라온 사람들에게 사람이 지나다니는 마룻바닥이나 복도에서 잘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형식보다는 인정이 우세한 모양입니다.

 

장터목산장, 온정을 베풀다

 

나와 애들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문 바로 앞에서 자게 됐지만 어쨌든 복도도 아니고 한 데도 아니고 방안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정말 운이 좋게도 담요 방에 배정됐는데 그 방은 딱 두 명만 배정받았다고 합니다. 담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그 방에서 남편이 사지를 마음껏 뻗고 잘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나의 대책 없는 용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14일과 15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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