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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이제 결혼 5년째 접어든 부부지만, 벌써 크고 작은 산을 여러 번 넘었다. 서로 주고받은 생채기가 가슴 속 이곳저곳에 제법 쌓였다. '사람과 살아가며 한 몸을 이룬다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크고 작은 사건을 통과할 때마다 어김없이 아프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지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을 때, 아침에 부스스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목젖이 보일 만큼 입을 벌리고 웃는 아내를 바라보았을 때….

쓸데없이 말이 너무 길었다. 나는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내는 나에게 많이 기대하고 꼭 그만큼 실망하기를 반복한 다음 2005년 6월 큰딸 별을 낳았다. 아내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서 나에게 "지난 일은 다 잊을게, 우리 잘 살자"고 말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친한 동생은 "누나가 형에게 희년을 선포했군요" 하고 웃었다(희년은 구약성서에서 50년에 한 번씩 모든 빚을 탕감하고 원래 땅을 되돌려주는 해다). 아내 말과 동생의 풀이는 별의 출산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기억난다

남편도 할 일이 많더라

아마 일반 산부인과를 찾았다면, 우리는 그런 출산의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병원에서는 진통이 길어지면 분만촉진제를 권하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수술을 제안하는 일이 흔하다.
▲ 함께 맞이한 출산 아마 일반 산부인과를 찾았다면, 우리는 그런 출산의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병원에서는 진통이 길어지면 분만촉진제를 권하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수술을 제안하는 일이 흔하다.
ⓒ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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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묻지 않았지만, 아내가 나에게 그런 고백을 한 건 아마도 함께 출산을 맞이했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사실 출산 과정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자궁 문이 열려 진통하는 아내의 팔·다리·배를 쓰다듬어주고, 마지막 힘주기를 할 때 함께 호흡한 게 전부다.

하나 더 들자면, "잘하고 있어" "옳지, 좋아" "다 됐어. 조금만 힘내" 따위의 말로 격려하려 했던 것. 내 손길이 조산사 선생님들의 진단에 비길 바 못 되고, 알지도 못하면서 쏟아내는 칭찬이 무슨 위로가 되었을까. 그래도 아내는 함께 출산을 맞이한 나를 기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일반 산부인과를 찾았다면, 우리는 그런 출산의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병원에서는 진통이 길어지면 분만촉진제를 권하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수술을 제안하는 일이 흔하다. 아이를 출산 과정의 주체로 인정하고, 아이의 생명력을 믿고, 아이와 엄마가 서로 호흡을 맞춰 출산하도록 배려하는 여유가 없다.

어두운 자궁에 있던 아이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분만실의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포근한 엄마 품 대신 차가운 체중계 위로 옮겨진다. 출산하는 공간이 갓난아이 처지보다는 수술하는 의사의 필요에 맞추어져 있다.

의료 시스템은 부모와 아이가 나누는 정서 교감보다는 보고와 기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산모 처지도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산 과정에서 산모는 의사 권위에 철저하게 따라야 할 객체다. 사소한 것 하나를 요구하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에 비하면 조산원은 출산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우리 부부가 두 아이를 낳은 열린가족조산원(원장 서원심)은 작은 것 하나까지 산모와 가족에게 의견을 물었다. 왜 그런 조치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했고, 선택이 필요한 경우에는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부모의 뜻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아빠가 출산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출산 전에 아빠와 엄마가 아기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출산 교육을 받았다. 출산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주고, 아빠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내가 아내 배를 쓸어주었던 것도,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던 것도 모두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부부가 출산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았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산고는 축복이다

조산원에서 아기를 낳더라도 교육받지 않으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출산을 지켜보는 남편이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조산원을 찾은 부부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내가 진통하며 마루를 기어 다니는 동안 남편은 신문을 보고 있었다.

혼자서 낑낑거리던 산모는 참다못해 남편에게 화를 내며 수술하러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진통은 할 만큼 다하고 몸에 칼을 대어 또 다른 고통을 겪을 걸 생각하니 남일 같지 않았다.

조산사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진통 과정과 시기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리 설명해주었다. 출산은 병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말했고, 산고는 엄마가 누리는 특권이라고 격려했다. 멋모르고 하는 내 말과는 격이 달랐다.

막바지 진통을 할 때 조산사 선생님이 아내의 배에 손을 얹어 놓고 "조금만 참아요, 이제 곧 진통이 멎어요" 하면 통증을 견디며 신음하던 아내는 바로 평온을 찾았다. 진통이 멈춘 1~2분 동안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방금 신음하던 사람 맞나 싶었다. 드르렁 코까지 골았다. 그러다가 조산사 선생님이 "곧 진통 시작해요" 하면, 아내는 "아~, 또 온다"며 진통을 시작했다.

진통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나오기 위한 과정이다. 엄마가 아픈 만큼 아이도 힘겹게 최선을 다해 세상을 향해 자기 온 몸을 내민다. 엄마가 진통을 못 참고 격하게 소리를 지르면 엄마 몸이 긴장하고, 그만큼 아기는 나오기 힘들어진다.

조산사 선생님은 "엄마 되는 게 쉬운 줄 알아? 엄마가 아픈 것보다 아이는 더 아프게 나오고 있는 거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 하고 따끔하게 야단치시기도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아'하게 두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조산원에서는 출산 뒤에도 갓난아기를 목욕하는 법, 기저귀를 접는 법, 젖을 물리는 법, 아이를 어르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젖몸살로 고생하지 않도록 마사지도 해주었다. 우리는 별을 낳고 일주일, 지난해 10월 둘째 '솔'을 낳고는 사흘을 조산원에 머무르면서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아빠가 되고, 언니가 되고, 관계 배우고

엄마 아빠가 되는 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내 한계를 보면서 또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놀랐고, 아빠가 되니 세상이 사뭇 다르게 보여 또 놀란다. 별은 동생을 맞이하며 새로운 관계의 질서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 둘째 딸이 나온 직후 엄마 아빠가 되는 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내 한계를 보면서 또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놀랐고, 아빠가 되니 세상이 사뭇 다르게 보여 또 놀란다. 별은 동생을 맞이하며 새로운 관계의 질서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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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을 낳을 때는 언니 별(당시 세 살)도 함께 출산을 지켜보며 엄마를 응원했다. 엄마가 진통을 하자, 별은 엄마 젖을 빨아주며 산고를 줄여주었다. 젖을 빨면 옥시토신이 분비돼 자궁 수축을 원활하게 한다고 한다.

별은 엄마 배 속에서 갓 나온 동생을 보며 연신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었다. 원장님은 태반과 피를 별에게 보여주며 "엄마가 동생을 낳느라고 아프니 한동안은 별과 못 놀아줘, 그래도 별은 괜찮지?" 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설명해주었다. 별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동생이 태어나면 시기하고 질투할까 걱정했는데, 별은 동생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별은 솔이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다니는 어린이집 '아름다운마을학교'에 솔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아직 안 된다고 이유를 말해주니까 등을 돌리며 솔을 업어주겠다고 했다. 안 떨어뜨릴 수 있다고 엄마 아빠를 설득하려 들었다. 솔이 울며 힘들어하자 이제는 안아 주겠다고, 수유 쿠션을 끼고 앉는다. 큰딸 말리느라 땀 좀 흘렸다.

엄마 아빠가 되는 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내 한계를 보면서 또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놀랐고, 아빠가 되니 세상이 사뭇 다르게 보여 또 놀란다. 별은 동생을 맞이하며 새로운 관계의 질서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면도 미워지는 마음의 변덕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경험한다. 솔이 하루하루 살이 찌는 사이 우리도 덩달아 자라고 있다.


태그:#출산, #자연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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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 살면서, 산림형 예비사회적기업 영월한옥협동조합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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