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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을 비웃기나 하듯 석 달 열흘 동안 붉은 사랑을 토해내는 나무가 있습니다. 꽃이 드문 7월부터 피기 시작해 9월 끝자락까지 뜨거운 여름을 달궈내는 목백일홍, 배롱나무입니다.

 

곱슬곱슬한 무더기 꽃술로 피어나 '아름다운 파마나무'(Crape myrtle)라 부르기도 하고, 일백 열흘 동안의 긴긴 꽃피움을 마감하면 가을걷이를 시작해야 하므로 촌부들은 '쌀밥나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이름은 간지럼나무입니다.

 

목백일홍의 나무껍질은 유난스레 매끈매끈합니다. 나무가 자라 연한 홍갈색 각질을 벗기 시작하면 하얀 무늬가 구름처럼 생기고 살결이 매끄럽게 탄력을 받습니다. 매끄러워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다 떨어질 정도이고 고양이가 나무를 오르다 곤두박질을 치기도 합니다.

 

껍질은 예부터 여인의 나체를 닮았다 해 집 안채나 여염집 뜰에 심는 것을 금기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절 마당엔 속세의 탐욕과 얽히었던 인연을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몸가짐으로 꾸준히 정진하라는 상징으로, 서당엔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기리란 표상으로 이 나무를 즐겨 심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미끈한 여인의 나신 앞에 불도나 서당공부를 정진하는데 장해물이 종종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에 지금도 남쪽 절마당과 묘역 앞엔 어디를 가나 백일홍이 붉게 초가을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옛날 어느 어촌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을 제물로 바치라 했답니다. 어느 해 한 장사가 제물로 뽑힌 처녀의 옷을 대신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개를 베었답니다. 처녀는 "죽을 목숨을 살려줬으니 평생 당신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소. 이무기의 목 하나를 백일 이내에 베어야 하오.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바다를 건너 올 것이오."

 

백일기도 후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 처녀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합니다. 붉은 깃발은 이무기가 죽을 때 뿜어낸 붉은 피었으나 장수는 처녀생각에 서둘러 바다를 건너오다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처녀무덤가엔 붉은 꽃이 서러운 이야기로 피고지기를 거듭합니다. 장사를 기다리며 백일기도로 피어난 꽃, 목백일홍이라 전해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담홍색 나뭇가지엔 서러운 분홍 꽃물이 닥지닥지 손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다시는 장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매서운 다짐인가 싶습니다. 폭염이 쏟아지는 일백 열흘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고지기를 거듭하는 백일홍 순정은 차라리 뜨거운 영혼이며 아픈 생명입니다. 비바람 불어 선홍빛 꽃물이 툭툭 떨어져 내리기라도 하는 날엔, 나무 밑은 붉은 꽃 이불이다가 때로는 활활 타오르는 열꽃 양탄자를 깔아놓기도 합니다.

 

들꽃 생태체험을 하러 시내 어린이집에서 많은 아가들이 찾아옵니다. 요즘은 꽃이 귀한 때이므로 배롱나무는 아주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어린 아가들에게 매끈거리는 살갗을 긁어보라 합니다. 그 때마다 배롱 잎사귀들은 간지러워 죽겠다며 파르르 몸서리를 쳐댑니다. 달걀모습을 닮은 잎사귀들이 '이제 그만하라'며 숨이 '까르륵' 넘어가도 뽀얀 속살을 자꾸만 긁어줍니다.

 

 

배롱나무가 간지럽다며 자지러질 때마다 논배미에선 긴 여름을 건너온 벼이삭들이 하나둘 피어나 가을바람에 고개를 조금씩 숙여가고 있습니다. 배롱나무의 일백 열흘간의 사랑 속으로 뜨거웠던 여름추억이 자꾸만 익어갑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네오넷코리아 '북집',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방문하면 고향과 시골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목백일홍, #배롱나무, #일백열흥동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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