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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텔레비전은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유명무실이다. 결혼한 지 8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신혼 때 산 뒤가 뚱뚱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이다. 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벽걸이 TV나 PDP TV은 언감생심이다.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모든 집안의 가전 제품이 신혼 때 그대로다. 바꾼다고 해도 텔레비전은 맨 뒤로 밀려 날 것이 뻔하다.

 

왜냐면 우리집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제당하고 있다. 그나마 텔레비전을 없애 버리지 않고 거실에 놔두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대신 텔레비전이 보이지 않도록 하얀 보드판으로 가려 놓았다. 아이들도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사주는 로보트 태권브이 DVD나 학습만화영화를, 아내의 통제 하에 보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댁에 가면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는다.

 

오로지 특별한 날에만 텔레비전을 켤 수 있다. 사회적으로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나 뉴스를 봐야 하는 경우나 좋아하는 축구를 비롯한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이 그것에 속한다. 뉴스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뉴스일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난 번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 탄생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축구경기가 있는 날도 퇴근하기 전에 전화를 해서 오늘 A매치를 하는 날이라고 말을 하고 미리 아이들의 공부를 마치도록 해야만 볼 수 있다.

 

 

아내는 내가 내셔널리그 축구 경기까지 직접 찾아가 보는 축구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라, 축구를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는 건 야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보는 것보다 차라리 가서 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A매치는 직접 보러 간다.  

 

이와 같이 텔레비전을 통제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저녁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안절부절했지만 요즘은 그래도 적응이 돼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본다. 우리집은 모든 방이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어려서부터 책을 봐야 한다는 아내의 신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아이들의 책 읽기와 공부를 위해 텔레비전을 금하고 있는 것인데 아이들의 아빠인 나로선 협조를 안 할 수 없다.

 

올림픽으로 다소 완화된 텔레비전 통제

 

그런데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올림픽이다. 축구는 물론이고 많은 스포츠를 맘껏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개막을 손꼽아 기다렸다. 개막 하루 전에 열린 한국과 카메룬의 축구 예선을 시작으로 텔레비전이 내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른 때 보다는 통제가 완화되었지만 중요한 경기가 아니면 어김없이 텔레비전을 꺼야한다고 아내는 나를 윽박지른다. 축구경기라면 우길 수 있지만 단순히 예선전을 하는 경기를 보겠다고 고집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찾아낸 이유가 "축구만 스포츠가 아니고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사격, 수영, 유도, 배드민턴, 레스링, 핸드볼 등등 비인기 종목도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아내에겐 먹히지 않는다.

 

 

그럭저럭 중요한 경기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광복절 연휴를 맞이해 서해안으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15일 첫날은 열심히 해수욕장에서 수영도 하고 모터 보트도 타고 재미있게 놀았다. 둘째날 16일 오전에는 물이 빠지면서 생긴 넓은 갯벌에서 머드팩도 하고 돌 밑에 숨어 있는 게를 잡거나 조개를 캐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주변에 있는 산악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려도 봤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자 나섰으나 날씨가 흐려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파도까지 높아지는 게 아닌가. 해수욕장에 텐트를 쳤던 사람들도 텐트를 걷고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난 물에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는 아들놈을 달래서 콘도를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바로 텔레비전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리모컨의 전원을 눌렀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통제를 하지 않겠지 하는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어김없이 올림픽 중계를 하고 있었다. 아들놈과 자세를 잡고 바닷물에 빠지지 못한 한을 풀 듯이 텔레비전에 빠져 들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걸린 것이 여자 역도 장미란 선수의 경기였다. 금메달이 확실시 된다는 보도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역도 경기에 대한 것을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인상이 어떻고… 용상이 어떻고… 몇 초 이상 들고 있어야 하고… 빨간 불이면 불합격이고 하얀 불이면 합격이라는 등등 …. 드디어 장미란 선수가 나왔고 다른 선수들이 실패하거나 포기한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거침없이 들어 올리는 모습에 우리는 박수를 치며 역도의 재미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장미란 선수는 인상에서 140kg로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다른 선수들과 격차를 벌려 놓았고 용상에서도 외국선수들이 힘들어하는 무게를 거침 없이 들어 올렸다. 용상에서도 186kg를 기록하며 세계 신기록을 기록한 장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딸아이도 여자 헤라클레스라는 해설자의 멘트를 듣고 엄마한테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내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통제하던 텔레비전을 보고 말이다. 이 시간만은 통제하는 엄마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서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아니 처음이다. 이제 막 6개월이 지난 셋째도 덩달아 좋아한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 나와 아들만이 축구경기를 보고 환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휴가를 와서 온 가족이 하나가 되었다. 그것도 축구가 아닌 역도라는 종목에서 말이다. 마침 날씨마저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꼼짝 못하게 하는 등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가족이 하나되도록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스포츠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한판의 달인 유도의 최민호, 마린보이 박태환, 양궁의 남녀 전사들, 사격의 진종오, 배드민턴 이용대, 이효정 등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이 나왔지만 역도의 장미란 선수가 월등한 기량으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역사적인 장면은 우리 국민 모두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우리 가족에겐 행운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가족은 다 보는 것을 행운이라고 할 수 있나 하는 비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선수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스타 탄생을 예고했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고통을 참고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역도의 미소천사 이배영,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자 카누 사상 처음으로 자력으로 진출한 이순자 선수 등 나라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열심히 뛰어준 선수 모두에게 온 국민은 사랑의 하트를 날려야 할 것이다.

 

선수들이 돌아오면 퍼레이드를 한다고 한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경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만큼 흩어진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특정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과거의 청산해야 할 유물이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 즐겨야 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3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갔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와 우리 아들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올림픽을 보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라는 말을 한다면 누구나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휴가를 가서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었다면 우리 가족은 정말 의미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왔을 것이다. 휴가라는 원래의 목적 속에서 올림픽이라는 이벤트가 더욱 우리 가족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축하해 주는 것은 좋지만 퍼레이드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땀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와 자신의 명예를 빛내고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온 국민에게 희망과 힘을 실어 준 것으로 우리 선수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퍼레이드를 생중계 하더라도 우리 가족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들과 딸의 뇌리에는 여자 헤라클레스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그 경기  난 이렇게 봤다 응모글


태그:#텔레비젼, #올림픽, #장미란, #역도,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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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PB로써 고객자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내 증권방송 앵커 및 증권방송 다수 출연하였으며 주식을 비롯 채권 수익증권 해외금융상품 기업M&A IPO 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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