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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름이 똑같은 친구가 하나 있다. 성(姓)까지 같아서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철없던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같은 반이었기에 "김민석!"이라고 선생님이 부르면 우리는 동시에 대답을 했다. 이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김민석A'가 됐고, 그 친구는 '김민석B'가 됐다. 주위 친구들은 줄여서 '민A(민에이)', '민B(민비)'라 불렀다. 그 친구가 B가 된 이유는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커서 출석번호가 뒤였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우리는 말썽쟁이였다. 공부보다는 '겉멋'에 관심이 많았다. 힙합에 정신이 팔려서 옷 사는 데만 몰두했다. 힙합의 정신이나 문화보다 괜히 멋있어 보이는 패션에만 관심을 두며 중학생 꼬맹이들이 제 허리보다 훨씬 큰 바지를 질질 끌고 다녔다.

시험기간에도 공부 외적인 것에 더 신경을 썼다. 어른들이 볼 때 철없어 보이는 행동도 셀 수 없이 했다. 이런 철없는 소년들의 사춘기와 방황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서로의 부모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고 학교에서는 그야말로 '말 안 듣는 민석들'이었다.

그러다 민비의 부모님께서 민비를 잡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될 날도 멀지 않았고 자식의 성적과 진로가 당연히 걱정되셨을 테다. 학원과 과외로 급작스레 바빠진 민비는 나를 포함한 말썽쟁이 친구들과 자유로이 만날 수 없게 됐다. 숙제를 제때 해내지 못하면 외출도 이전처럼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자의는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 학생에겐 '스파르타식 교육'이 나름 효과가 있었나보다. 민비는 성적이 많이 오르게 됐고, 가장 친한 친구의 성적 향상을 멍청하게 지켜 본 나는 그때부터 마음을 먹고 공부에 매진하게 됐다.

똑같이 공부를 못했을 때는 몰랐는데, 한 명이 학교에서 '더 나은 민석'이 되니깐 어린 나이에 충격과 자극을 받았었나 보다. 이후 나도 꾸준히 성적이 올랐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쭉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대학생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민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철없던 동명(同名)의 두 소년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힙합 옷에만 국한됐던 그들의 대화 주제는 진로와 사회문제로 발전이 됐다. 악동과 다름없었던 두 학생의 대변신에 부모님들을 대견히 여기며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됐다.

한때 동반입대를 생각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사정상 나보다 빨리 군 입대를 하게 됐다. 그리고 오늘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이 특별한 편지 봉투를 뜯어보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민에이에게'로 시작하는 꼬질꼬질한 군바리의 편지였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같은 특별한 편지 봉투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같은 특별한 편지 봉투
ⓒ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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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생일 전날 훈련소에서 쓴 그 편지에는 군대 생활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온통 친구인 나를 위해, 군 생활의 도움이 될 만한 팁들이 하나하나 적혀있었다.

"우표, 편지지, 편지봉투 많이 가져와. 특히 우표는 나중에 지급해 주니까 잊지마" "스킨, 로션, 샴푸 가지고 와도 돼" "군화 사이즈는 한 사이즈 크게 신고, 깔창과 밴드는 필수야" "행군 대비해서 물파스 가지고 와도 돼"

편지의 제목처럼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군 생활의 답답함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일 법도 한데, 아니면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글을 쓸 법도 한데, 군대를 먼저 간 나의 친구는 내게 군 생활의 세세한 점까지 조언을 해주었다. 모든 조언 끝에는 "나중에 올 때 진짜 걱정하지 말고 와"라며 오히려 민간인을 달래주는 이 군인 친구는 너무도 성숙해 있었다. 지독한 말썽쟁이였던 이 친구가 한편으로는 고맙고 또 늠름한 모습에 자랑스럽기도 했다.

사실, 편지를 받기 이틀 전 '민비'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의 아버지 번호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민에이냐?"라는 두꺼운 목소리의 전화 속 정체를 난 알 길이 없었다. 내 주위에서 '민에이'라는 표현을 쓰는 어른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친구인 줄 알았다. 허나 그의 아버지였다.

"민에이야, 나 '민비' 아빠다. 잘 지내니?"

당신의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옛 말썽쟁이에게 직접 전화를 거신 거다. 고등학생 시절 '민비'와 같이 학원을 다녔을 때, 가끔 차로 데려다 주시면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 멋진 아저씨였다.

대학생이 되어 훌쩍 커버렸다고 생각한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그렇다. '민에이'라는 표현을 쓴 어른도 있었다. 바로 '민비'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다소 어색한 이름 아닌 이름을 자연스레 불러주신 분들이다.

아저씨가 오랜만이라 무척 반가우면서도 말썽을 핀 전력이 있기에 약간 긴장했던 나였지만 "더운데 수고한다"면서 따뜻한 음성이 전화를 통해 전해지자 마음이 녹아들었다. 그러면서 군대를 간 당신의 아들이 걱정되셨는지 '민비'가 "X연대 Y중대 Z소대 몇 번"이라면서 인터넷을 통해 사진도 보고 편지도 써주라 부탁하셨다. 무뚝뚝한 보통의 아저씨들과는 다른 따뜻함이 있는 친구 아버지의 통화에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한때는 공부 안하고 놀러 다닌다고 혼내던 아저씨가 이젠 자식 걱정에 직접 전화까지 하시니...

사실 아저씨의 부탁이 있지 않았어도 가장 친한 친구인 '민비'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었다. 그래도 아저씨의 이런 통화는 매우 반가웠고 감사했다. 더구나 오늘 편지까지 왔으니 당장 기나긴 답장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를 쳐다보는 친구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이 네 이름'이기에 서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묘한 느낌으로 정을 쌓아간 친구 사이는 참으로 특별한 것 같다. '말 안 듣는 민석들'이라 회자됐던 중학생 시절도 어느덧 추억이 되어 버렸다. 각자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또한 '민석'이라는 이름 앞에 멋진 수식어가 붙을 수 있게 노력하자는 약속을 편지에 담아야겠다.

"힘내라, 민석!"

덧붙이는 글 | 동명(同名)의 제 친구 김민석군은 지난 7월 28일에 입대를 했습니다. 2010년 6월 12일 그가 제대할 때까지, 건강하고 씩씩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기원합니다.



태그:#친구, #동명, #편지,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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