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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1호 흥인지문
▲ 흥인지문 대한민국 보물 제1호 흥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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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몹시 고프고 졸음도 마구 쏟아진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날밤을 새운 뒤 바라보는 서울 하늘은 나그네의 후줄근한 옷차림처럼 우중충하다. 저만치 탑골공원 담벼락에 마치 인간쓰레기처럼 이리저리 뒹굴며 곤한 잠에 취해 있는 한 사내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마치 이명박 시대의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다.

뭘 먹고, 어디 가서 눈을 잠시 붙일까. 에라, 모르겠다. '흥인지문'이나 본 뒤 결정하자. 흥인지문을 향해 무작정 터벅터벅 걷는다. 가로수 사이로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빛도 무더위에 추욱 늘어지고 있는 진초록빛 나뭇잎처럼 풀려 있는 듯하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었는가. 누가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맥 빠지게 만들었는가.

흥인지문 앞에 서서 다섯 손가락을 헤아려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이는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어짐과 옳음 예의 지혜 믿음을 밝혀놓은 낱말이다. 불교를 국시로 삼고 있었던 고려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조선이 선택한 국시이기도 했던 이 다섯 가지 유교 이념에는 방향도 들어 있다.

인(仁)은 동쪽을, 의(義)는 서쪽을, 예(禮)는 남쪽을, 지(知)는 북쪽을, 그리고 신(信)은 중앙을 뜻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목(木, 동쪽) 화(火, 남쪽) 토(土, 중앙) 금(金, 서쪽) 수(水, 북쪽)와 같다. 근데, 왜 뜬금없이 유교 타령이냐고? 흥인지문이 동대문으로 불리는 까닭도 흥인의 인(仁)이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수도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
▲ 흥인지문 대한민국 수도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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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은 조선시대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이다
▲ 흥인지문 흥인지문(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은 조선시대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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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수호신 사대문과 사소문은 모두 무사한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에는 모두 4개의 큰 문(사대문)과 4개의 작은 문(사소문)이 있다. 사대문은 정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東大門), 정서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西大門), 정남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南大門), 정북의 숙청문(肅淸門, 북문 北門)이 그것이다.

이 사대문 중 조선 오백년 동안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는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 때 시 구역 개수계획이라는 명분으로 헐리고 말았다. 한 가지 서글픈 일은 일제가 돈의문을 헐 때 목재와 기와를 경매했는데, 그 속에 수많은 불상과 보물이 나와 이 문을 샀던 사람이 큰 횡재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소문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수구문 水口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 뒤에 소의문 昭義門으로 바꿈, 서소문 西小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紫霞門), 동북(東北)의 홍화문(弘化門, 중종 6년 혜화문 惠化門으로 바꿈, 동소문 東小門)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문은 창의문뿐이며, 소의문은 자취도 찾을 수 없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는 성벽을 많이 무너뜨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교의 이념에 따라 붙여졌다. '흥인지문'은 어질고 착함을, '돈의문'은 의로움을, '숭례문'은 공손과 예의를, '숙청문'은 지혜로움을 뜻했다.

특히 숙정문이라 불리는 숙청문은 정북을 뜻하는 지(智)자를 넣어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청(淸)자를 넣어 숙청문이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숙청문 주변의 지형이 험난해 사람이 오갈 수 없었고,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늘 닫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지(智)자를 넣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전해지고 있다.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 1398년에 처음 지었다
▲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 1398년에 처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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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은 고종 6년, 186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흥인지문 지금의 문은 고종 6년, 186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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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6월 8일(일) 오전 11시쯤에 찾았던 대한민국 보물 제1호 흥인지문. 나그네는 사람들이 흔히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지문을 차를 타고 자주 지나쳤다. 게다가 지난 사월까지만 하더라도 나그네는 한 번도 대한민국 수도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흥인지문 앞에 서서 역사의 흔적과 조상의 숨결을 찬찬히 더듬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오월부터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날밤을 새운 뒤 마땅히 오갈 데가 없을 때마다 천천히 걸어 흥인지문을 찾곤 했다. 한 번은 비가 올 때, 한 번은 햇살이 쨍쨍 내리쬘 때, 또 한 번은 꽤 늦은 밤에 찾았다. 그러니까 나그네가 흥인지문 앞에 선 것은 이번이 꼭 네 번째다.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 전래동요 '대문놀이'

버스와 화물차, 택시, 자가용들이 세차게 다니는 흥인지문 앞에 서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본다. 환청일까. 어디선가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라는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환시일까.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가시나 하나와 머스마 하나가 술래가 되어 손을 맞잡고 동대문을 짓는다.

까르르~ 까르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가시나 머스마들이 서로 섞여 앞에 선 가시나 머스마의 허리를 잡고 길게 꼬리를 문 채 동대문을 지나기 시작한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 동대문을 지었던 가시나와 머스마가 재빨리 손을 내리고, 동대문을 지나던 가시나 머스마 하나가 갇힌다. 또 한번 까르르~ 까르륵 숨넘어가는 해맑은 웃음소리가 파아란 하늘로 울려 퍼진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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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의 특징은 도성의 8개 성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쌓았다는 점이다
▲ 흥인지문 흥인지문의 특징은 도성의 8개 성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쌓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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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이 네 글자인 까닭?

흥인지문(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은 조선시대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이다. 흥인지문에 대한 서울시 홈페이지 자료를 살펴보자.

원래 '흥인문'이었던 이 문의 이름이 언제부터 '흥인지문'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철종 끝자락까지의 <실록>에 흥인지문이란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 이 문을 고쳐 지으면서 흥인지문으로 바꾼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근데, 사대문과 사소문은 모두 세 글자로 되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문만 네 글자인 흥인지문이라 이름 지었을까. 이 문을 네 글자로 지은 것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남, 서, 북 모두 지(地)의 기세가 있는데 유독 동쪽만 지(地)의 기세가 부족하단다. 까닭에 지(地)의 음을 따서 '지'(之)자를 덧붙였다는 것.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 1398년에 처음 지었다. 이어 문종 원년인 1451년과 단종 원년인 1453년에 고쳐지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문은 단종 때 고쳐 지은 그 문이 아니다. 지금의 문은 고종 6년, 186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흥인지문 전체가 썩고 상해 지탱하기 어려워 전 부분을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은 1958년에도 또 한 차례 보수공사를 한다. 그때 문루(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천장에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이 상량문에 따르면 고종 때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맡았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터를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 무지개)를 쌓았다. 지금의 옹성 또한 그때 새로 쌓은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옹성은 작은 성이지만 특히 적을 막아내고 성을 지키기에 아주 편리하다. 철옹성이란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 흥인지문 옹성은 작은 성이지만 특히 적을 막아내고 성을 지키기에 아주 편리하다. 철옹성이란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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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과 사소문에는 없는 자그마한 성이 흥인지문에만 있는 것일까
▲ 흥인지문 사대문과 사소문에는 없는 자그마한 성이 흥인지문에만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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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 중 흥인지문에만 철옹성이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지붕은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4면을 모두 열어놓았다. 하지만 위층은 기둥 사이를 네모나게 갈라 각각 한 짝 열 개의 널빤지로 만든 문을 달았다.

흥인지문의 특징은 도성의 8개 성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쌓았다는 점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 혹은 치성(雉城, 자신은 숨기고 밖을 잘 엿보게 쌓은 성)이라 부르는 성이다. 이 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첫 삽질을 해 4월에 완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옹성은 작은 성이지만 특히 적을 막아내고 성을 지키기에 아주 편리하다. 철옹성이란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근데, 왜 하필 사대문과 사소문에는 없는 자그마한 성이 흥인지문에만 있는 것일까.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이 문 주변의 지형이 낮은 데다 이 문 북쪽의 산도 낮고 평탄해 적을 막아내기에 부적당한 곳이었다. 때문에 이 문 둘레에 옹성을 쌓아 그러한 약점을 막아보려 했던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옹성도 예전의 그 옹성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융희 2년, 1908년 3월부터 흥인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모조리 철거했다. 지금 동쪽과 서쪽에 쬐끔 남아 있는 옹성은 아마 그때 철거되고 남은 성벽을 일부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손길에 옹성 대부분을 잃어버린 흥인지문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입맛이 씁쓸해진다
▲ 흥인지문 일제의 손길에 옹성 대부분을 잃어버린 흥인지문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입맛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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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밉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얄밉기만 하다. 나그네는 그동안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근데,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일본의 손길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일제의 손길에 옹성 대부분을 잃어버린 흥인지문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입맛이 씁쓸해진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떤 외세나 외침도 당하지 말자. 우리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을 자꾸만 드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태그:#흥인지문, #동대문, #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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