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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이 비좁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전역 앞 광장이 좁아졌다.  대전 지하철이 생기기 전만 해도 대전역에 내리면 제일 먼저 가슴 뻥 뚫리는 광장의 바람이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하지만 지하철 공사가 시작된 이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지금까지 대전역 광장은 점점 광장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그나마 좁아진 광장 한가운데로 택시 정류장이 가로지르게 되면서부터 대전역 광장은 이제 광장이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할 만큼 협소해졌다. ‘광장이 좁아진 현실 앞에 어째서 실존적인 존재인 ‘나’는 가슴이 막막하고 답답해지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생겨난 의문은 점점 더 깊은 시름을 낳기 시작했다.

 

광장이란 어떤 곳인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던 고대 그리스에는 ‘아고라’라는 광장이 존재했다. 이곳은 대중을 위한 집회 장소였고 정치와 역사, 예술을 자유롭게 논하던 시민들의 토론의 마당이자 소통의 공간이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있어 광장이란 단순한 만남의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밀실에 꼭꼭 숨어 있고 싶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타인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커질 상황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광장이 없는 밀실들만 존재하는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광장은 그러한 의미에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분노를 불출시켜 주는 해방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소원해진 연대를 형성하는 소통의 장으로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 얼마의 공간이 있다. 공공의 편의를 위해 사용될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공간을 분할해야 할 상황이 왔다손 치더라도, 광장의 의미를 퇴색시킬 의도가 아니었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현명하게 공간을 분할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먼저 그 공간을 지혜롭게 활용하지 못한 설계자의 철학 부재가 한탄스럽다. 이것 역시 이 정부가 시인했던 소통의 부족 혹은 부재와 무엇이 다를까.

 

소통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설계된 대전역 광장은 광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비좁은 땅이 되었다. 노래비 앞을 지나는 행인들이 흘리고 간 음식 찌꺼기에 혈안이 된 비둘기들은 끊임없이 그 붉은 발가락에 먼지를 묻혀가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이젠 비둘기에게도 그만큼 날아다닐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대전역 광장은 반쪽짜리다.

 

그런데 이 반쪽짜리 광장에 어느 때부턴가 시민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한 지도자의 무지함을 규탄하기 위해서, 타 지역에 비해 움직임이 굼뜨기로 유명한 대전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즉각적이지도, 쉽게 흥분하지도 않는 대전 시민들의 성향 때문이었을까. 유명 연예인들조차 가장 콘서트하기를 꺼려하는 도시 중 하나가 바로 대전이라는 것쯤은 이제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바로 그들이 요 며칠 비좁은 반쪽짜리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심한 척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지금 광장은 포화상태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의 촛불을 밝혔다. 그래서 반쪽짜리 광장의 밤은 낮보다 훨씬 더 환하고 뜨겁다. 이들의 순수성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배후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고 임영조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갈대에겐 배후가 없다”고. 자꾸만 배후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의 배후엔 과연 무엇이 있는지 그 속내가 궁금할 뿐, 고유가 시대에 물가상승 앞에서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대다수 시민들에겐 의심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만족시켜줄 만한 배후가 없다. 단지 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불안과 가슴 속에 꺼지지 않은 양심이 굳이 배후라고 말해야 한다면 또 모를까.

 

반쪽짜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젊은 시절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 부처님 품 안에서 도를 닦던 한 스님은 도저히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도량을 박차고 광장으로 나와야만 했다고 성토했다. 그뿐일까. 일 분 일 초가 전쟁 같을 고3 수험생들과 태어난 날을 헤아리기조차 민망한 어린 아기들을 유모차에 끌고 나온 부모들의 심정이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데이트를 즐기러 나왔던 연인들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집회에 합류하는 모습과 마주칠 때면 촛불을 밝힌 순수성을 의심하는 세력들의 배후설에 코웃음이 절로 난다.

 

양초는 무슨 돈으로 사느냐고 물었는가. 여고생들의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가 모금함으로 직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당신들도 직접 광장에 나와 보시라. 등허리가 90도로 꺾인 할머니의 쌈짓돈이, 수행하는 스님의 바랑에서 나온 지폐가, 군것질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주머니에서 꺼낸 어린이들의 용돈 몇 백 원이 모금함에 채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거기 있지 말고, 직접 광장으로 나와 보아라. 아니 그보다 먼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겠다는 그 약속부터 지켜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서민들의 지갑은 날로 얇아져가도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걱정하는 시민들이 지닌 그 양심의 두께는 여전히 두툼하다.

 

택시 승강장이 대전역 광장을 가르고, HID가 서울시청 광장을 점거해도 시민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또 다른 광장을 개척하고 지켜낼 것이다. 시민들의 배후를 의심하기 이전에 당신들 가슴 속에서 오래전에 잠든 양심의 배후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지금 반쪽짜리 광장과 반쪽짜리 정부를 온전하게 회복해 가는 건전한 시민 의식을 자신들의 정치 논리로 왜곡하고 호도하기 전에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할 때가 아닌가.

 


태그:#대전역,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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