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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여 전쯤 TV를 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KBS1 TV <단박인터뷰>에 김민기 학전 대표가 출연한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미디어와 마주하기를 몹시 꺼립니다. 한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그와의 인터뷰를 과제로 내줬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입니다.

 

<단박인터뷰> 제작진이 그를 카메라 앞에 앉히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어쨌든 <단박인터뷰> 진행자인 김영선 PD와 그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김영선 "반갑습니다. KBS <단박인터뷰> 김영선 PD라고 합니다. 너무 쑥스러워하세요. 제가 다 쑥스럽습니다."

김민기 "원래 좀 그래요."

 

김영선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민기 "뭐 일이 많죠."

 

참 그답다, 하는 생각이 들며 웃음이 나더군요. 이후에도 인터뷰는 어눌한 말투에 어색한 웃음, 대개는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습니다. 김영선 PD가 안쓰럽게까지 느껴졌습니다. 그 가운데 그래도 그의 목소리를 이끌어낸 몇 대목만 보겠습니다.

 

"다들 밝은 쪽만 얘기를 하니까..."

 

김영선 "그래도 대표께서 만드신 노래들이 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이었지 않습니까. '아침이슬' 같은 노래들은요. 근데 만드신 본인은 직접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김민기 "작게 말을 했는데 그렇게 굉장히 크게 울렸을 때 굉장히 당혹스럽죠. 그리고 너무 과분하고 과중한 짐이었던 것 같아요.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저한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크게 이렇게 되니까 그건 책임지기가 버겁죠."

 

김영선 "남들이 보기에 굉장히 의지와 사회적인 의식을 가지고 만든 노래처럼 알려져 있잖아요."

김민기 "그냥 보이는 것을 일기 쓰듯이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지. 그게 무슨 어떤 의지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거나 뭐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영선 "그런데 <지하철 1호선>도 그렇고 사회적인 어떤 메시지를 담고 이런 것들이잖아요."

김민기 "그건 메시지가 아니라 지금 사회를 그린 것이니까 기록이겠죠. 예전에 노래 만들고 그럴 때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공이 있으면 빛을 받으면 절반은 어차피 그늘일 수밖에 없는데 다들 밝은 쪽만 얘기를 하니까 이쪽은 왜 얘기를 안 하느냐 이쪽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쪽을 얘기한 것뿐인데 그럼 전체를 평형감각으로 봐주면 될 텐데 이쪽을 얘기하는 것이 마치 무슨 사회를 선동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는 독일희곡을 번안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독일정부가 주는 괴테메달을 받았습니다. 시상식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나오는 '아침이슬'을 듣고 "아주 끔찍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시상식에서 원작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로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대의 양심이 되었고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시대의 양심과 목소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부담스러워요.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단박인터뷰>를 즐겨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마지막에 출연자에게 좋아하는 노래를 묻고 몇 소절을 직접 부르게도 합니다. 당연히 그는 "좋아하는 노래의 노자도 싫어해요"라며 사양했습니다(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80년대 언젠가 술자리에서 선배의 강권에 못 이겨 그가 '사노라면'을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대신 김영선 PD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봉우리'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선생님께 직접 청해 듣고 싶지만 경악하실 것 같아서."

김민기 "혈액형이 바뀌기 전에는 못할 거예요."

 

결국 '봉우리'는 라이브가 아니라 배경음악으로 깔렸고, 그렇게 그와의 <단박인터뷰>는 끝났습니다. 김영선 PD는 지난 5월 <단박인터뷰> 방송 1돌을 맞아 가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40여 회의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로 그를 꼽았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혁명가

 

앞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렇지만 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로, 저항가요의 신화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는 그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기회인 듯싶어 조금 길게 인용해 보았습니다.

 

김민기.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그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보고 느끼고 그것을 노랫말로 다듬어 선율을 붙였을 뿐인데, 시대가 그를 '신화'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사람들이 김민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늘 김민기보다 한 박자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빗자루를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집으면 세상을 청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박수를 친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도, 시위하다 끌려간 '학우'를 떠올리며 불렀던 '친구'는 고등학생 시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배를 기리며 만든 노래고, 시위 현장에서 '투사의 노래'로 바뀌어 불렸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에 있을 때 정년퇴임 하는 선임하사에게 주는 선물로 만든 노래고, 집회 시작 전 비장하게 합창하던 '상록수'는 공장에서 일할 때 동료 노동자의 결혼식 축가로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광장의 '애국가'로 자리 잡은 '아침이슬'조차 대학을 휴학하고 동숭동을 배회하다가 '그냥 그저 재미삼아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꿔 본'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 탓에 80년대 초중반 때 후배들로부터 '지식인적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죠.

 

그런데 말이죠. 그렇다고 그 노래들의 의미가 빛이 바래는 걸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 자신의 얘기처럼, 그 노래들을 만든 건 그이지만, 그 노래들의 주인은 그 노래를 무대에서, 집회에서, 광장에서, 술자리에서 불러온 모든 사람들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그의 노래를 사랑한 건 비록 그 노래가 개인의 감상에서 태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어두운 곳에 눈길을 보내고 그것을 치열하게 기록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과 서로 닿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의 노래들은 음악사적으로도 "애조로 일관하던 우리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놓은 혁명"이었고, "그를 통해 노래는 위안과 오락에 소용되는 일회용 소모품의 지위에서 벗어나 역사와 동행하는 통찰력의 산물"(대중음악평론가 강헌)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울려 퍼지는 '아침이슬'

 

 

오는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대표 한동헌)'이 콘서트를 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목이 '노찾사, 김민기를 부르다'입니다. '아침이슬', '작은 연못', '금관의 예수', '잃어버린 말', '상록수', '기치촌', '공장의 불빛', '봉우리' 등 그의 노래 20여 곡이 불리고 연주된다고 합니다. 또 주로 통기타 반주로 불렸던 그의 노래들이 곡에 따라 재즈나 탱고 풍으로, 또는 더욱 클래식하게 더욱 국악적으로 변주된다고 하는군요.

 

이번 공연에서 노찾사는 그의 노래를 재해석, 재조명함으로써 특히 '지성적 대중음악'의 전통을 만들어내려 하는 듯싶습니다.

 

오는 14일에는 한국대중음악학회(회장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한국 대중음악과 비판적 지성'이란 심포지엄을 열기도 합니다.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www.fec.or.kr)에서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음악은 어떻게 시대와 만나는가'(김창남)를 기조발제로 해서 '김민기, 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끝'(노래비평가 이영미), '80년대 노래운동의 한 양상-문승현의 경우'(김병오 전주대 교수) 등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사실 노찾사와 김민기의 인연은 깊습니다. 1984년 겨울 뮤지컬 '개똥이'를 준비하던 그가 대학 노래동아리 후배들을 만나 만든 음반이 바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이었습니다. 그는 이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후 민중가요의 아이콘이 된 노찾사 태동에 산파 역할을 한 셈입니다.

 

후배들의 이번 공연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그는 공연장에 올까요? 무대에 오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1999년에도 후배들이 '김민기 헌정 콘서트'를 개최했지만 정작 그는 쑥스럽다며 객석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상이 빗나가기를 기대해봅니다만, 그가 오든 안 오든 그의 노래를 통해 그곳에 그는 함께할 것입니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기념일입니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김민기와 노찾사도 6월 항쟁의 기억이 각별할 것입니다. 그해 6월의 거리와 광장에서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줬던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습니다. 노찾사는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는 그 어떤 현장과 무대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그 보답을 받았습니다. 1971년 발표되고 얼마 뒤 판금 조처됐던 데뷔앨범 <김민기>가 복각 음반으로 다시 나온 것도, 앞서 얘기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 대중과 정식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였습니다. '노찾사'가 단지 음반 제목이 아니라 노래모임으로서 실체를 갖추고 이름을 갖게 된 것도 1987년 공연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몇 시간 뒤면 6월의 그 광장에서 촛불이 밝혀지겠지요. 그리고 다시 '아침이슬'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울려 퍼지겠지요. 혹시 주말 공연에 참석할 분들이라면 미리 목청을 틔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덧붙이는 글 | '노찾사, 김민기를 부르다'는 13일, 14일은 저녁 7시 30분, 15일은 오후 4시 공연합니다. 문의전화는 02-3216-8507. 


태그:#노찾사, #김민기, #아침이슬, #6월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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