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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멀고 먼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드디어 이삿날이 밝았다. 알뜰살뜰하신 꼬냥이님, 이사 일주일 전부터 만들어놓은 체크리스트를 꼼꼼히 살펴보며 당일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나갔다.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된 것이 뿌듯한 꼬냥이. 아쉬울 법도 한데 어쩜 이리 반 푼어치의 미련도 없는지.

이제 남은 건 보증금을 둘러싸고 벌어질 배추도사와의 결전, 사실 그간 세렝게티 옥탑 리얼 다큐의 독자 분들이라면 짐작하셨겠지만 이 배추도사라는 양반이 호락호락 꼬냥이를 방생해줄 리 만무했다. 뭐 딱히 집을 부쉈다거나 하자를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련한 꼬냥이 정신상태는 노이로제를 넘어선 단계라 이사 전부터 배추도사가 무슨 급반격을 해올지 걱정이 남산이었단 말이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그날!

마지막 날까지 사뿐히 지르밟아 주시는 배추도사

이사 당일, 꼬냥이를 돕고자 출동해주신 오마이뉴스의 나영준 기자님, 그간 음주 가무로 쌓인 몹쓸 정 탓에 새벽 댓바람부터 옥탑에 출몰해주셨다. 우리가 또 음주 가무로 맺어진 의리 하나는 또 끈끈하지 않은가.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아침 6시부터 옥상에 올라와 문을 두드리며 이사준비 검사하시는 배추도사. 9시에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오시자마자 동참하여 멈출 수 없는 참견 욕구를 그대로 표출하신다.

"이봐, 거기다 쓰레기 놓으면 안 돼. 나오는 대로 바로 갖고 내려가."
"어이! 살살 내놓으라고! 장판에 '기스' 나면 우짤겨?"

그렇지, 그렇지. 그냥 넘어가면 배추도사가 아니지. 꼬냥이야 이미 예상한 상황이지만 이사업 15년에 저런 집주인은 처음 본다며 혀를 끌끌 차시는 아저씨들. '자취 10년차인 저도 저런 집주인은 처음 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충 짐이 빠져나가고 이제 슬슬 그간 걱정해온 보증금 문제를 해결봐야할 텐데 배추도사는 이사 참견만 해대고 영 뭘 내줄 기미가 안 보였다. 내 돈 내가 받겠다는데 왜 꼬냥이의 75A 아담한 슴가가 두근두근 대야 하는지…. 이유 없이 두 눈 질끈 감고 배추도사에게 말했다.

이사 준비에 놀란 복댕.
▲ 난리굿! 이사 준비에 놀란 복댕.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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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이제 주셔야지요."

참견을 멈추고 삐딱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배추도사. 그 순간의 표정은 뭐랄까, 마치 말 안 하고 넘어가면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는 뭐 그런 찜찜한 표정이랄까.

"따라 내려와 봐."

덜덜덜- 마지막 결전이다. 마지막이다. 떨지 말고 쫄지 말고 가드 올리고!!

하악! 그래도 배추도사 앞에 독대를 하고 앉으니 떨리는 건 도리가 없었다. 배추도사는 뭔가 2008년 첨단문명과 어울리지 않는 꼬질꼬질한 일수 장부 같은 것을 펴보이며 하나하나 짚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짚어 봐도 뭐 뜯어낼 것이 없어서 아쉬웠는지 봤던 페이지 또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는 배추도사.

그러다 뭔가가 떠오른 듯 두 눈이 반짝였다.

"아! 이사 들어올 총각이 벽지랑 장판이 지저분하다고 새로 해달라더군."

멍!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씀이신지….

"색시도 한 20만 원 내놓고 가. 벽지랑 장판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두둥! 아니 '웨웨웨!'('왜왜왜'의 강한 표현!)

"아…. 아니 벽지랑 장판은 아무런 문제 없어요."

젠장,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공격 스킬로 사람을 패닉 상태로 만들다니. 역시 고단수였어! 머릿속에는 할 말들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듯 넘치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곤 "어… 어…버…버" 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승리의 미소를 슬쩍 짓고 앉은 배추도사, 이대로 쥐꼬리 반 토막도 안 되는 보증금을 뜯겨야 할까.

그 때!

"이삿짐 다 실었대. 어서 나와라."

인사하자!
▲ 슬슬 방빼야지? 인사하자!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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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도사 집 현관이 열리며 등장하시는 음주가무 패밀리 나영준 기자님! 그의 등 뒤로 흘러 타고 넘치는 후광은 착시가 아니었단 말이지!

예상치 못한 지원군의 등장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배추도사! 꼬냥이는 금방이라도 안구에서 쓰나미라도 뿜어낼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영준 기자님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흑, 오빠! 할아버지가 도배 장판비로 20만원 내놓으래. 어흐흑!"

그 때의 모양새를 되짚어보자면 말이다. 마치 동네 노는 삼촌에게 아껴 먹던 막대 사탕을  뜯기기 직전에 그 삼촌의 엄마를 만나 그의 만행을 꼰지르는 코찔찔이 애 같은 모양새였다고나 할까. 물론 그 삼촌은 백수짓 하며 어린애 사탕이나 빼앗아 먹는다며 즈그 엄마한테 등짝이 터지도록 얻어맞았겠지.

배 째, 등 따!

"드러누울까요? 예? 영감님, 해도 해도 너무하네. 제가 그냥 여기서 드러누워요? 예?"

오오오! 어차피 마지막, 그간 배추도사의 만행을 귀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나영준 기자님은 마지막까지 날강도짓을 서슴지 않는 배추도사로 인해 드디어 칼을 빼들고 전투모드에 돌입하셨다.

"이 총각이 왜이려! 고깟 20만원 내는 게 뭐가 어때서?"
"아, 그깟 20만원이 별 거 아니면 영감님이 내라고요! 꼴랑 보증금 그거 얼마 된다고 그걸 뜯어먹어요? 양심이 없어도 정도껏 이어야지!“

원래 배추도사가 남자에겐 무지 약하다. 젊은 남자가 배 까고 드러누워 버리는데 그간의 서슬 퍼런 배추도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더라는 말이지. 역시 영감, 꼬냥이는 만만했던 게다.

"아니…내가 꼭 내라는 건 아니고, 이사 들어올 총각이 새로 도배를 해달라는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조금 내주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었지…."

얼씨구!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 정이라곤 코묻은 월세로 얽혀진 정 말고 뭐가 있던가. 혈기왕성 젊은 총각의 들이댐에 바로 급비굴해지는 배추도사. 이럴 거면 차라리 칼을 뽑질 말던가.

"그래서 뭡니까, 달라는 거에요, 말라는 거에요?"
"아, 됐어! 그거 얼마 한다고 그냥 내가 기분좋게 보내줄 테니까. 어서 짐 싸서 나가!"

이미 파무침처럼 잡쳐버린 기분, 뭘 기분좋게 보내준다는 말인지. 아무튼, 뱉어버린 말, 주워담기 전에 어서 철수하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에 후다닥 짐을 싸고 도망치듯 이삿짐 차에 몸을 실었다.

안녕, 세렝게티!

"이봐! 이봐!"

이삿짐 차의 시동이 부르릉 걸리고 바이 바이 인사할 겨를도 없이 출발을 하려는데 뒤따라 황급히 뛰어나오는 배추도사.

"저 주인 영감 왜 저런대요?"
"아저씨, 튀어요! 튀어!"
"튀…튀어? 오호라, 오케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대강 감이 잡힌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선 안절부절 삿대질을 해대는 배추도사.

나름 꼬냥이의 소심한 복수랄까?

이삿짐을 싸면서 도저히 무겁고 쓸모없어서 버리려던 물건을 욕실 구석에 한가득 쌓아놓은 것 정도? 그리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삭고 쪼그라든 냉동실의 음식을 치우지 않은 것 정도? 또 싱크대 문짝이 고장나서 내려앉고 욕실 등이 깨진 것을 신고하지 않은 정도?

후후, 그간 당한 설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상큼한 복수 아니던가.

과연 이 복수 중에 무엇을 발견하고 저리 따라나와 동동 질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이미 떠난 몸. 반 푼어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세렝게티 옥탑을 떠났다.

물론 앞으로 살게 될 집의 집주인은 또 어떤 기괴함으로 꼬낭이를 당황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극악 공포 배추도사를 겪고 난 후이기에 그 누굴 만나도 이보단 나으리.

안녕~★
▲ 독자 여러분! 안녕~★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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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누군가는 인생의 설계를 하는 시기라 하고 누군가는 지칠 만큼 부딪혀봐야 하는 시기라 한다. 비록 모 뉴스에서는 옥탑에서의 삶을 극빈층으로 분류하더라만 이 궁상맞도록 아련한 청춘의 시기가 아니면 언제 누려볼 추억이던가.

떠났다. 징글징글하게 낭만적이던 내 몫의 하늘을 떠났고 지지리도 눈물겹던 20대의 방황으로부터 벗어났다.

이제 서른, 질풍노도의 불완전한 시기가 지나가리니.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 끝 간데없이 휘청이던 20대의 방황으로는. 그러나 30대를 훌쩍 지난 어느 봄날, 어쩌면 그리워질지 모르는 내 몫의 한 평 남짓한 하늘, 나의 20대, 그리고 꼬장꼬장한 세렝게티 옥탑방 배추도사의 잔소리. 그 모든 것이 내 삶을 지탱해준 잔혹한 동화였음도 영원히 잊지 않기를.

휘청대던 내 20대의 세렝게티, 안녕.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세렝게티 옥탑방의 리얼 다큐를 사랑해주신 많은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세렝게티에서의 추억은 이제 접어두고 새로운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아무래도 꼬냥이다운 글을 쓰는 게 최선이겠지요? 새 글 꾸러미를 들고 찾아뵐 그날까지 건강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서 하나 된 촛불, 그 타오르는 빛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소서.



태그:#옥탑방, #집주인, #자취, #세렝게티, #봄날꼬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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