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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올 한 해 동안 연중기획으로 '쓰레기와 에너지'를 다룹니다. 지난 5월에 '친환경 결혼'을 주제로 쓰레기 문제를 다뤘고, 6-8월은 '쓰레기 이동을 막아라'는 주제를 통해 쓰레기 감량과 재활용 없이는 결국 쓰레기 절대치가 변함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계획입니다. 이번엔 매일 홈쇼핑 시청자와 홈쇼핑 미시청자가 서로 역할을 바꿔, 홈쇼핑이 우리 소비 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돌아봅니다. [편집자말]
'100명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것은 100대의 슈퍼컴퓨터로도 불가능하다.'

소련이 망한 1990년대 초반 어느 학자는 신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인간의 욕구(수요)는 무한한데 그것을 채워줄 물건(공급)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 대 유한의 일대일대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이처럼 어차피 안 되는 일인데 괜히 헛고생만 했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한 마디로 그런 주장은 이론을 위한 이론일 뿐이다. 그의 주장은 계획경제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나 시장법칙을 좇는 자본주의 모두에 적용되는 논리일 뿐이다. 한 개인의 경우를 보자. 그가 갖고 있거나 버는 돈은 상대적으로 유한하다. 그런데 그가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은 상대적으로 무한하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수요와 공급'이라는 물적법칙만으로는 그 불일치를 해결하지 못한다. 

유한한 돈과 무한한 욕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그것을 대응시키는 주체의 자각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이던 아니면 개인 차원이던 간에, 자신의 재무형편에 맞게 욕구를 조절하는 관점과 방법이 문제다. 사회 차원에서 자원의 배분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핵심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돈을 쓰는 통제력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40대는 홈쇼핑 볼 시간도 없다.
 대한민국 40대는 홈쇼핑 볼 시간도 없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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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 볼 시간도 없는 40대 가장

2주 동안 홈쇼핑을 보고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원래 보지 않던 그룹이 홈쇼핑을 보고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대답은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평소 관심도 없었지만, 사실 그런 걸 볼 시간 자체를 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바둑 둘 시간도 없는데, 물건 파는 광고를 볼 시간이 있겠는가.

"대한민국 40대, 정말 불쌍해요. 홈쇼핑 볼 시간도 없거니와 물건 살 돈도 없어요."

중간에 <오마이뉴스> 담당자로부터 확인전화를 받았을 때 해준 말이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지만 사실 그게 현실이다. 집이 강화라 올 초부터 주말부부를 하고 있는 내게 주중 퇴근시간은 늘 밤 12시 전후다. 중고등학생 셋을 둔 내 형편에 꼭 사야 하는 특별한 물건이 아닌 이상은 충동구매란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료로 온라인소식지를 받아보는 게 몇 되는데, 읽는 것 자체도 바쁘고 내용도 너무 경쟁력 키우라는 투라 몇 개는 수신을 거부했다. 요즘은 맘에 드는 한 곳만 받아본다. 작은 돈이지만 후원하고 싶어서 통장번호를 적었다가, '아냐, 아직은 좀 더 절제할 때다' 하는 맘이 들어 포기했다. 이럴 정도인 내가 홈쇼핑을 보다 혹 하는 마음이 들어 물건을 산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하다. 하루는 '디카' 광고를 봤다. 평소 우연히 본 것들은 주로 여성 속옷 광고였는데, 그날은 디카 광고를 차분하게 했다. 요란하지 않게 주로 사용방법 중심으로 설명했다. 일시불로 사면 1만원 할인도 해준다. 제법 기능이 많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애들이 막 쓰기는 좋을 듯해 보였다. 중학교 1학년인 막내가 얼마 전 자신이 모은 돈으로 온라인쇼핑몰에서 디카를 샀는데, 제대로 기능을 확인해 보고 잘 샀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이런 거라면 이 광고를 보면서 차분히 살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도 괜찮겠군.'

지난 가을 나는 고3인 첫째 딸에게 제법 비싼 디카와 노트북을 사줬다. 이런 방면에 무지해서 아예 이 분야에 실력이 있는 회사 직원에게 부탁했다. 디카는 온라인쇼핑몰에서 직원이 대신 사줬고, 노트북은 매장에 함께 가서 직원이 골라주는 걸 샀다. 이렇게 꼭 사야 하는 것이고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그 정보를 쇼핑몰에서 자세히 보고 듣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매장에 가서 사람한테서 설명을 들으면 왠지 끌려가는 느낌도 들고 사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도 드는데, 홈쇼핑에서 광고를 볼 때는 그런 데서 자유로우니까 편한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충동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나야 여윳돈도 거의 없고 홈쇼핑 볼 시간도 거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를 것 같다. 얼마 전 재무상담을 받은 고객과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다 홈쇼핑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 고객은 이렇게 말했다. "어, 저는 홈쇼핑 자주 하는데…" 의외였다. 사치를 하지도 않고 저축도 많이 하는 그녀와 홈쇼핑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느껴졌다. 나의 어색한 표정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엄마랑 같이 해요. 그런데 반품도 많이 해요."

그럼 반품을 잘 해준다는 뜻일까? 언젠가 나는 전화로 주간지와 그에 딸린 경품을 구매했다 반품하느라 무척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지난 가을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단감 한 상자를 택배로 보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게 엉뚱한 집으로 배달됐다. 아내가 보상받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하는 걸 들었는데, 몇 달 후에 물어보니 결국 받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일을 끝까지 차분하게 마무리하지 못하는 아내도 잘못이지만, 쉽게 반품이나 보상을 하지 않는 기업들 태도도 문제다. 그런데 홈쇼핑은 반품을 잘 해준다? 나와 아내가 경험한 회사들보다 더 큰 회사들이고, 거래가 빈번하고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그럴까? 아무튼 믿을만한 이용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틀리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음, 고객이 불편하지 않게 객관정보도 제공하고, 충동구매를 했더라도 반품까지 친절하게 잘 해준다면 뭐가 문제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지난해 읽은 행태심리학 책 내용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일단 물건을 사면 자신의 행위가 잘 한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반품을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고객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품을 잘 해준다는 믿음을 주는 것은 쉽게 구매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나름대로 그런 실속이 있으니 그렇지 홈쇼핑 업체들이 반품을 반가워하지는 않겠지.'

위 고객이야 그래도 꽤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실속에 맞지 않으면 반품이라도 하지, 일반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나야 볼 시간과 쓸 돈이 워낙 빠듯하니 예외라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홈쇼핑의 현란한 광고술에 안 넘어가고는 못 버틸 듯하다. 이태리 어느 업체와 단독계약한 판매라면서 등장인물(이런 직업을 뭐라고 하던데…)이 하는 말은 사람의 구매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보세요, 여기 허리선 디자인. 이게 바로 이태리 00회사만이 갖고 있는 기술이죠. 이런 세련된 디자인 상품을 오늘 이 시간에 구매하는 분 3000명에게만 한정판매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품목은 매진됐다는 표시를 요란하게 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몸매 자랑 화면은 계속 이어진다. '창립 00주년 기념'이라는 문구도 계속 번득인다.

그런데 그렇게 고객의 맘을 확 끌어 판매했다고 치자. 물건을 받아본 다음 이성을 되찾아 반품하는 경우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어떤 것은 '어!' 하는 사이에 반품기한을 넘기고 어쩔 수 없이 구매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 같다. 그것이 특히 오랫동안 나눠서 돈을 내야 하는 보험사 상품인 경우라면 그 손해는 꽤 금액이 크다.

소득공제 된다고 연말에 급히 구입한 7200만원짜리 보험상품

한 홈쇼핑 회사의 인터넷 홈페이지.
 한 홈쇼핑 회사의 인터넷 홈페이지.
ⓒ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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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재무상담을 받은 고객인 김상현(32세 미혼, 가명)씨는 지난해 12월 27일 홈쇼핑을 보다가 장기주택마련보험 상품을 구매했다. 월 30만원씩 20년 동안 납입하는 상품이다. 미혼인 김씨에게 가장 필요한 건 결혼자금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기상품을 구입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득공제 되고, 비과세고, 복리효과까지 있는 상품이라고 해서요." 연말 소득공제 서류를 제출하면서 소득공제라는 말이 확 들어왔다고 한다.

물론 상품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쇼핑몰에서 판매자가 한 말은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상품의 이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씨의 재무 처지다. 그 상품은 20년 동안 돈이 묶이는 장기상품이다. 결혼자금이 모자라면 김씨는 대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다른 상품 같으면 쉽게 해지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상품은 해지하면 몇 달 동안 낸 보험료를 거의 받지 못한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속 끌고 가야 한다. 말 그대로 강제저축인 셈이다.

홈쇼핑에서 보험상품도 많이 판다. 김씨처럼 홈쇼핑을 통해서도 보험이 많이 팔리는가 보다. 보험은 속옷 광고처럼 눈을 현란하게 해서 팔지는 않지만, 상품의 이점만을 현란하게 반복해서 보여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보험상품은 월보험료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비싼 상품이다. 김씨가 산 보험상품은 30만원씩 20년 동안 내는 보험이다. 원금만 7200만원이나 되는 엄청나게 비싼 상품이다. 이런 상품을 자신의 재무체력과 장기목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구매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홈쇼핑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흔히 하던 것처럼 보험설계사를 만나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가입하곤 한다. 꼭 홈쇼핑 자체가 유죄(?)라고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강의하러 지하철을 타고 가다 문득 이런 명제가 떠올랐다. '상품은 죄 없다.'

마침 그날 강의는 금융상품보다는 주로 개인의 돈 통제력을 다루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가는 도중 김씨 사례가 생각났고, 홈쇼핑에서 상품의 이점만을 반복해서 강조했던 것 자체가 유죄(?)라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라. 파는 사람이 어찌 사는 사람 개인의 이러저러한 재무형편과 욕구를 알겠는가? 물론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는 사람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맞는 구매관점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 언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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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 기획취재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뤄졌습니다.



태그:#홈쇼핑, #장기주택마련보험, #충동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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