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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우리들의 착한 뇌는 겁이 많다. 철지난 기억을 계속 자신 안에 가둬두다간 병이 되고 상처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유통 기한이 끝났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지워버리고 만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이란 뇌가 자신의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낸 개념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스물여덟 번째 맞이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다. 세월이 벌써 그렇게 많이 흘러갔는가. 하릴없이 망월동 묘역에서 열린 제2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TV로 지켜보았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5·18 기념식에 직접 참석했던가. 더듬어 보지만 흐린 기억은 대답하지 않는다. 90년대 이후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것 같다. 광주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검문이 삼엄했던 80년대엔 꾸역꾸역 참석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난 그렇게 방관자가 되어왔다. 이제 멀리서 TV로 기념식을 지켜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무심해지고 무덤덤해진 것이다. 이젠 '그 날'에 대한 통증은 씻은 듯이 사려졌는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그 날'을 떠올릴 수 있는가.

 

잊혀진 '그날'의 통증을 되살리기 위하여  

 

 
어제 시내 책방에서 산 <28년만의 약속>이란 책을 펼친다. 80년 당시 중앙일간지 사진기자였던 이창성이란 분이 5·18 항쟁 당시 현장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펴낸 책이다.

 

나는 사진집을 아주 좋아한다. 한국 전통춤 사진은 물론 절집 사진·풍경 사진 등 각종 사진집을 즐겨 구입하곤 한다. 사진 속에는 현실이나 사실보다 더 현실 같은 생생함이 박혀 있다. 사진 속에는 현실이나 사실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 작가의 눈이 순간적으로 놓치지 않고 포착한 진실이 있다.

 

진실은 우리가 자신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실은 긴장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만다. 사는 데 게으른 나는 언제나 사진집을 통해 작가가 포획한 진실을 뒤늦게, 새삼스럽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내게 부족한 삶의 리얼리티를 보충 섭취한다.

 

이창성 사진집 <28년만의 약속>은 한 마디로 나 같이 기억을 위한 뇌 용량이 작은 호모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위한 책이다. 책 속엔 백여 장의 흑백 사진과 스물여섯 장의 컬러 사진이 들어 있다. 80년 5월 18일~27일의 광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계엄군이 물러간 이른바 '광주공동체'라 불리는 시기의 시민군의 활동과 광주 시가지의 모습을 찍은 것들이다.

 

중앙일간지 사진기자로 광주에 급파되어 취재 중이던 저자가 쉽사리 촬영을 허락지 않는 시민군 지휘부를 설득해서 겨우 취재 허락을 받아 찍은 것들이다. "역사를 기록해 후세에 남기겠다"라는 명분으로.

 

그렇게 해서 무장 호위 병력과 지프 차량까지 지원받은 저자는 광주 시가지를 누비면서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시내 풍경과 시민군의 생생한 모습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책 속에 든 사진들은 이른바 '광주공동체'라 불리는 시기에 찍은 것들이다.

 

항쟁은 진압되고 공동체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저자는 전과 다름 없이 취재현장을 누빈다. 사진부장·편집국 부국장을 거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그가 항쟁기에 애써 찍었던 사진들은 공개되지 못한 채 덧없이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당국의 검열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사진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항쟁 지휘부와의 약속은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던 것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를 채우고 있는 건 광주항쟁 사진들이다. 마치 현역 군인처럼 경계를 서고 있는 시민군의 모습, 까맣게 불탄 채 광주역 앞을 질주하는 시민군 차량, 시민군이 탄약을 정비하는 풍경,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시민군들의 모습 등.

 

차량에 구호를 적어넣은 채 달리는 시민군 사진에선 광주민중항쟁이 지향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또 양동이에 식수를 담아 나르고 시민군에게 음식을 제공해 준 어머니들을 찍은 사진에서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 혹은 대동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그리고 결기에 찬 눈빛을 지닌 시민군의 사진에선 '그들이 목숨을 버려 얻고자 했던 사회는 과연 이뤄졌는가?'라는 반성이 필연적으로 뒤따라 온다. 

 

'특종과 낙종의 사이에서'라는 제목을 단 2부에는 그가 1967년~1979년 사이에 찍었던 중요한 사진들이 들어 있다.

 

1967년 동국대생의 데모 진압 장면, 대연각호텔 화재, 판문점에서 북한군에 의한 헨더슨 미군 소령 구타사건, 팬텀기 추락과 군사재판정에 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모습 등 기자였던 저자 자신이 목격했던 전후 한국현대사의 주요 현장들을 사진으로 증언하고 있다.

 

기억한 것만이 남아서 역사가 된다

 

저자는 '광주항쟁과 나의 사진기자 30년'이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매년 5월이면 나는 광주항쟁 기간에 마주쳤던 시민군들의 그 형형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취재편의를 제공해준 시민군 지휘부는 계엄군 진압 때 거의 모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에 대한 채무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라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책 제목을 '28년만의 약속'보다 차라리 '28년 동안 지키지 못한 약속'이라 했던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켰다는 쪽에다 무게를 두기보다 지키지 못 했다는 자책감 쪽에 더 무게를 싣는다면 말이다.

 

흔히 "역사는 기억을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한다. 또 "애써 기억한 것만이 역사가 된다"라고도 한다. 기억이 가진 메커니즘은 매우 자의적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습성을 가졌다. 고통스러운 것은 한사코 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5·18의 기억을 더는 간직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아니, 이만하면 충분히 고통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5·18의 기억을 함부로 버려선 안 된다. 역사는 과거를 집단적 기억으로 만들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은 의지의 문제이다. 기억하려는 자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창성 사진집 <28년만의 약속>은 고이 간직해두고 싶은 책이다. 간직해 두고 자신이 점점 세상의 일에 무관심해지는 듯 싶거나, 삶에서 지향해왔던 것들이 정처 없이 흔들릴 때마다 수시로 꺼내 보면서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싶을 때 들여다보고 싶은 책이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무디어진 통증을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 보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나오는, 여비가 떨어진 이븐 바투타에게 여비를 쥐여주던 다마스쿠스의 한 교사처럼 말한다.

 

"유용할 때가 있을 터이니 간직해 두게, 형제여!"

덧붙이는 글 | 28년만의 약속/ 눈빛/ 이창성/ 35,000원/ 2008.5


28년만의 약속 - 5.18 광주항쟁과 특종의 순간들, 이창성 사진집

이창성 지음, 눈빛(2008)


태그:#5.18, #눈빛 , #이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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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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