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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심기를 끝낸 남하리 들녘. 어린 모들의 푸르름이 무척 싱그럽게 다가온다.

증평군 문화유적 기행을 떠난다. 증평은 충청북도의 한가운데에 있다. 동쪽은 괴산군 청안면,  서쪽은 청원군 북이면, 북쪽은 진천군 초평면, 음성군과 이웃하고 있다. 증평이란 이름은 증천과 장평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청안현에 속했던 증평은 1895년(고종 32)에 이르러 비로소 청안군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1949년에 읍으로 승격했으며 2003년 가을에는 괴산군에서 떨어져 나와 증평군으로 승격하였다.

 

증평역에서 기차를 내린다. 역 앞에 서자, 동서로 길게 솟은 산이 보인다. 두타산(598m)이다. 내가 사는 대전의 식장산과 높이가 같은 산이다. 오늘 내가 답사할 곳은 남하리 지역의 미륵들이다.

 

미륵은 현재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있는 부처다. 석가모니 입적하고 나서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 안의 용화수 아래서 도를 이룬 후 3회에 걸쳐 설법을 펼침으로써 석가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불이다. 이러한 미륵하생신앙은 인도에서 발생해서 중국을 거쳐 서기 6~7c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고난에 처한 이 땅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증평역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굴다리를 지나 청원군 초정 방면을 향해 걸어간다. 지도 상으로 보면 남하리까지는 십리 남짓 되는 길이다. 둔덕마을에서 남하2리쪽으로 난 샛길로 접어든다.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들판의 모습이 무척 싱그럽다. 먼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여온다. 저도 춘궁기를 안다는 뜻일까. 이상하게도 뻐꾸기는 모심기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울어댄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동병상련이 무엇인지 잘 아는 녀석 같다.

 

 미륵마을 입구의 장승들.

 멀리서 바라본 미륵들.

이윽고 미륵마을로 접어든다. 미륵마을 입구에선 지역 박물관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 옆 구릉 위를 바라보자 세 구의 석불 입상이 눈에 들어온다. 저 석불들이 바로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 남하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불 입상들은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마도 예전엔 동구(洞口)가 내가 걸어들어온 곳이 아니라 미륵이 바라보는 쪽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미륵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가까운 절에 한 보살이 있었다고 한다. 보살은 자신의 절이 그리 번성하지 못한 원인을 미륵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미륵을 미워했다. 성정이 난폭한 보살은 마침내 미륵들을 쓰러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미륵들은 오랫동안 방치돼 채로 있었다고 한다.

 

미륵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1949년의 일이었다. 마을 뒷산에 성주사라는 절을 세운  윤월인이라는 스님이 앞장서 세웠다는 것이다.

 

고난에 찬 민중에게 희망의 표상이 되어준 미륵

 

 가까이서 바라본 큰 미륵(3.5m)과 작은 미륵 (1.5m~1.3m).
 
미륵불의 곁으로 다가가서 찬찬히 미륵의 면목을 살펴본다. 매우 귀가 긴 큰 미륵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왼손을 가슴 부분에 올려 연꽃송이를 받치고 있다. 두 팔에 걸친 옷은 흘려내린 형태이며 배 아래엔 활 모양의 주름을 넣었다. 이러한 보살상의 형태는 고려시대 중기 이후 지방에서 유행하는 보살상의 특징이다.

 

오른쪽에 세워진 작은 불상들은 본래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 시멘트로 형상을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다. 키 작은 두 석불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제작 연대가 각기 다른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누군가가 키 큰 미륵불을 아버지 부처로 상정하고 그 옆에다 자식 부처를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닐는지. 조금 유치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바로 민중들의 소박한 심리를 대변하는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작은 미륵의 머리를 잘라버린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지배계층은 민중의 소박한 상상력조차도 몹시 두려워한다.

 

 절터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신 할머니. 어쩌면 할머니 자신이 미륵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수덕사대장군이라 쓰인 절 입구 장승. 아마도 절이름이 수덕사였나보다.

여기까지 온 김에 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성주사라는 절의 옛터를 찾아보기로 한다. 마침 미륵 근처를 지나던 50대의 주민이 지나간다. 그에게 절터를 물었더니 마을 뒷산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준다. 뒷산으로 난 길을 올라가자 우물이 나타난다. 현재도 쓰고 있는 우물인지 물이 비교적 꺠끗하다.

 

근처에서 깨밭을 매고 있던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옛 절터를 물었다. 바로 위에 있는 인삼밭 너머라고 알려준다. 할머니는 올해 79세라고 한다. 할머니가 이 마을에 시집온 것은 19살 적의 일이었다. 얼추 계산해서 60년 전이다. 마을의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다.

 

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할머니께서 시집 왔을 적엔 그곳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월인이라는 스님이 마을 뒷산에  성주사라는 절을 세운 때가 1949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라는 얘긴가? 할머니에 따르면 그 스님은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고 한다. 아마도 해방 공간에서 약간 좌익 사상에 경도돼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한국전쟁이 끝나자 절은 잠깐 폐사되었다가 다시 세워지는 곡절을 겪었다.

 

미륵의 출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폐사된 절터 풍경. 얼마나 심혈을 가울여 가꾸었는지 알 수 있다.
 아직도 절터를 지키는 돌탑.

할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서 절터로 올라갔다. 절터 입구에는 수덕사대장군이라 쓰인 장승이 서 있다. 아마도 절 이름이 성주사에서 수덕사로 다시 바뀌었나 보다. 절집이 사라진 절터를 지키는 건 2기의 장승과 돌탑들이었다. 돌탑 위엔 한때 밤마다 절의 어둠을 밝혔을 등이 쓰임새를 잃은 채 외로이 얹혀져 있다. 아마도 절이 없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터. 

 

절터 아래 골짜기 사이로 언뜻언뜻 남하리 들녘이 바라다보인다. 절의 주인이 바뀌고 그에 따라 절의 건물들이 유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저 들녘은 평상심을 유지한 채 묵묵히 제 자아를 지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들녘이야말로 완벽하게 부처의 심성을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절터를 나와 산길을 내려온다. 절이 왜 폐사되었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절이 폐사된 것은 3년 전이었다고 한다. 절의 주인과 땅 임자가 다른 것이 원인이었다. 절 임자는 해마다 쌀 한 가마니를 세로 바치고서 땅을 사용했는데 땅 임자가 그만 땅을 내놓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폐사의 운명을 겪게 된 모양이다.

 

미륵 입상이 서 있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한 번 미륵들을 바라본다. 삶이 고단할수록 이 땅의 민중들은 미륵이 나타나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때로는 미륵불의 출현을 바라던 민중의 심리를 이용해서 반란이나 새 왕조를 개창하는 혁명을 꿈꾸거나 자신이 미륵이라고 참칭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궁예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민중의 믿음을 이용하여 미륵의 현신을 칭하고 권력을 추구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현재도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불들을 마을의 수호불로 모시고 있다 한다.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수시로 달에 왕래하는 21C에도 미륵불은 여전히 민중의 신앙의 형태로 유효한 것이다. 민중이 굳이 미륵의 출현을 갈구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 세상은 언제나 도래할는지.

덧붙이는 글 | 5월 30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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