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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한창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한국에 머물러 있을 무렵, 저의 1월은 참 따뜻했습니다. 경험해본 세상이라곤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 밖에 없었던 저는 큰 결심을 하고 인도로 떠났습니다.

 

주변에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외국 땅이 '인도'라는 말에 겁을 주며 크게 만류했습니다. 아주 더럽고 위험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더 커다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이유는,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온 소위 '봉사활동'이라는 것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1월 6일의 일기. "오늘은 여러모로 몰아쳤다. 산에도 올라가고 마을구경도 하고. 산은 민둥산. 가는 20분의 산행 내내 한 쪽 길을 채우고 있는 주민들. 뭘까. 연민이 아니었다. 나의 감정은. 연민을 느끼려는 노력에 가깝다. 이 아이의 손을 잡아야 하는 걸까? 왠지 아이들이 악세사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는 내가 나쁜건지."

 

인도 북부의 불가촉천민 마을에 갔을 때 산비탈의 처음부터 끝까지 빽빽이 앉아서 구걸하는 뼈만 앙상한 아이들과 노인들을 보았을 때 참 막막했습니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민. 불가촉 천민이 모여사는 그 곳. 

 

해골같은 얼굴로 갓난아이들을 안고서 '박씨씨(구걸)'를 외치는 할머니들. 손을 잡아달라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 사진에서 자주 보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돌조각이 가득한 흙바닥을 가로지르는 맨발. 나뭇가지 같은 팔 다리. 다 찢어진 옷. 못씻어 까만 얼굴에 가득 낀 하얀 때와 무스를 바른양 곱게 빗어넘긴 떡진 머리.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웃고 있었습니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 새도 없었습니다. 뭔가 쾅 머리를 내려친 것 같았습니다. 나와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이 맞는 걸까? 분명히 사진으로, 다큐멘터리로 많이 보아왔던 모습인데, 지구의 빈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나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내가 이들을 보면서 울어야 하는 것인지, 웃어야 하는 것인지, 돈을 주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도 동정심에서 나온 위선 같았습니다.

 

그렇게 답답한 가슴을 가지고 손을 잡아달라며, 안아달라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뿌리치며 억지 눈물을 지으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참 이상한 마음이었습니다. 인도에 괜히 착한 척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매일매일이 놀랄 일들이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로 오는 깡마른 아이들은 밥을 먹기 위해서 학교로 옵니다. 하루에 한 번 배불리 먹기 위해서. 진수성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똑같은 삶은 쌀 한덩어리에 노란 국물같은 멀건 '달'을 뿌린 것이 전부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100원 짜리 과자는 정말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어떻구요. 우리 조와 같이 일을 했던 40줄은 되보일 것 같았던 노동자 '랄람'과 '마힌다르'의 나이가 저와 또래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이겠지요. 22살, 저와 동갑인데도 아이 2명이 있는 어엿한 가장인 마힌다르는 뒤축이 다 닳아 반밖에 안남은 슬리퍼를 참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산에 오를 때는 슬리퍼를 들고 맨 발로 갈  정도였으니.

 

마을에는 흙으로 만든 집들이 가득합니다. 박물관에서나 무심코 보고 지나쳤던 원시시대의 흙집들에 그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등 하나 없는 축축한 흙방 안에서 아이들은 짚더미를 덮고 잡니다. 양치를 할 때는 주변의 치약나무를 꺾어서 쓱쓱 문지릅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더라
 

한 달 동안 사람이 이런 최저의 생활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몇 차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학생들과 노동자들과 함께 뒤엉켜 일하고, 놀고, 웃고, 울며 생활한 그 짧은 시간은 그들이 생활만 다를 뿐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래 부르면서 놀기를 좋아하고, 고마운 마음을 아끼고 아껴놓았던 과자로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곳에서 생활한 나도 그 곳에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그냥 잘 못 씻고, 풀풀 날리는 쌀로도 행복해하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은 내가 그들의 위에서,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월감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들을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직접 와서 보고 몸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어쩌면 평생 몰랐을 일이었습니다. 

 

1월 16일의 일기 "처음에는 측은지심을 느껴야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아이들. 브라다, 시스타를 연발하면 손을 잡아 오는 이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더라. 다 찢어진 옷과 먼지구덩이 머리카락. 그냥 안아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안아올릴 수 있겠더라. 동냥, 동정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더라. 매일 삶은 쌀과 노란 국물같은 달만 먹지만, 그것조차도 하루에 한 번. 양껏 먹지도 못하지만 그들은 웃고 있지 않은가. 계산하지 않고 낯선 외국인의 손을 부여잡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봅니다. 저는 아주 작은 단편만 보았을 뿐이지요. 도움을 원하는 수많은 손길은 너무도 가냘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곳까지 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닿지도 못하고 잠겨있는 그 손들을 우리가 찾아서 잡아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 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태그:#인도, #해외봉사, #자원활동, #둥게스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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