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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경리씨가 타계한 5일 빈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조문객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박경리씨가 타계한 5일 빈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조문객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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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 <토지> '서문' 몇 토막

한국 문학의 거목이 쓰러졌다. 한국 문학을 일구어내던 토지가 무너졌다. 지난달 4일 뇌졸중과 지병 악화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매단 채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5일 뇌졸중 등 합병증으로 결국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 박경리 선생(4월 26일자 오마이뉴스 참조)은 그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 지난해 7월 폐암에 걸렸다. 하지만 선생은 <토지>의 작가답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고 박경리 선생의 생전 모습(2000년 9월).
 고 박경리 선생의 생전 모습(2000년 9월).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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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를 접한 문단 한 관계자는 "고인은 우리 문학사에 <토지>라는 새로운 생명의 땅을 남겨놓고 가셨다. 우리 문인들은 이제 고인이 남기고 가신 문학의 토지에 새로운 문학의 씨앗을 뿌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일궈내 고인이 못 받은 노벨문학상을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문단 관계자는 "고인은 한국 문학에 샛별과 같은 분이셨다. 이제 그 샛별이 떨어졌으니 무엇을 좌표로 삼아 이 캄캄한 문학의 밤길을 걸어야할지 모르겠다"며 "고인이 25년 동안 매달려 완간한 <토지>는 예전에도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고 박경리 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작가 김동리(1913~1995)의 추천으로 월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와 <파시>, <김약국의 딸들> 등을 내놓으며 한국 문학사의 샛별로 떠올랐다.

특히 선생이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25년에 걸쳐 쓴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원고지 3만1200장)는 문단에서 '광복 이후 한국 문단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토지>는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 가극, 창극 등으로도 만들어져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선생의 유족으로는 딸 김영주(62)씨와 사위 김지하(67, 시인)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현대아산병원이며,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남 통영.

토지의 어머니,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다

우리 민족의 <토지>로 남아 우리 곁을 영원히 지킬 것만 같았던 박경리 선생이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같은 문학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운하기 짝이 없다. 선생과 살아생전 개인적으로 한 번도 곁에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작품으로만 알고 지냈던 토지의 어머니, 강연장에서 멀찌감치 지켜보았던 토지의 어머니 박경리 선생. 그 선생의 모습을 이제는 작품과 사진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게 되다니. 안타깝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 알았더라면 지난해 원주에 갔을 때 바쁘더라도 선생을 뵙고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내가 직접 찍은 선생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었을 것을. 이제 선생의 모습은 영원히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문인들의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문인들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는 말이다. 근데, 하필 선생의 모습만을 담지 못했다. 이런! 남이 찍은 사진에서 선생의 모습을 대하게 되는 낭패라니.

어쩌랴. 좀 더 부지런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하지만 너무 자학을 할 필요는 없다. 선생의 작품이 선생의 살아생전 모습처럼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의 작품 토씨 하나하나에 선생의 숨결이 골고루 담겨 있지 않은가. 선생이 남긴 <토지> 위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려 잘 가꾸는 것이 선생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 박경리가 <토지>를 달랑 남겨놓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 작가 박경리가 <토지>를 달랑 남겨놓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 나남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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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거대한 마침표' 어떻게 찍었을까 

대하소설 <토지>는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끝났다. 25년이나 걸린 <토지>의 '거대한 마침표'는 소설 속에서도 8월 15일(1945년)이었다. 1897년부터 1945년까지 하동 평사리에서 서울과 간도, 일본을 넘나들다가 마침내 끝 간 데 없이 드넓은 평원에 다다른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

8월 15일 새벽,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에서 <토지>의 마침표를 찍은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끝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배만 살살 좀 아프네요"라고. 왜 배가 갑자기 살살 아파왔을까. 너무 오랜 세월 씨름을 하다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자 배까지도 너무 놀랐기 때문일까.

<토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 <토지>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딸 양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머니 서희에게 일본의 패망을 전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토지>의 마지막 1주일 동안 선생은 새벽 2시에 일어나 원고지 앞에 앉았다. 글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때에는 원고지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펜촉을 원고지에 댔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신기하게도 문장이 술술 이어져 나갔다고 했다. 이어 아침 6시가 되면 실잠에 잠시 들었다 일어나 고양이와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집안일과 밭일 등을 했다.

"소설과 소설 쓰기의 마지막이 우연하게도 8월 15일에서 끝난 것이었다. 당초에는 8월 10일쯤 완결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7월 하순 경주에서 열린 문학인 대회와 지독한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낯선 방문객들 (기자들 같은) 때문에 늦어진 것이었다. 굳이 8월 15일에 맞출 생각은 없었다."

고 박경리 선생 생전 모습(2004년 마산MBC 창사특집 특별대담).
 고 박경리 선생 생전 모습(2004년 마산MBC 창사특집 특별대담).
ⓒ 마산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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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우리 문인

<토지>는 연재가 계속될 때 뿐만 아니라 완간 뒤에도 문단에 다양한 논의의 불씨를 당겼다. <토지>에 관한 비평서만 해도 이미 여러 권 출판되어 있다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전국 대학원에 제출된 <토지>를 다룬 석, 박사 논문만 해도 이미 수십 편에 이르며, 지금도 <토지> 연구자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문학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우리 문인과 작품'으로 작가 박경리 선생과 작품 <토지>가 뽑혔다. 이와 함께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교수 등 전문 독자 300명과 일반 독자 300명 등 총 6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박경리와 <토지>가 각각 60.7%와 58.3%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토지>는 국제적으로도 인기가 드높다. 1983년에는 <토지> 1부가 일본 문예신서에서, 1994년에는 <토지> 1부가 프랑스 벨퐁출판사에서, 1984년에는 <토지> 1부가 영국 키건폴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으며, 지금 독일어 번역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문학의 거목이자 세계 문학의 거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박경리 선생. 이제 선생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저 뭇 생명을 키워내는 땅 <토지>로 되돌아갔다. 선생께서 <토지> 서문에 쓴 글을 다시 꼼꼼하게 되새김질하며 선생의 영전에 큰 절 올린다. 부디 잘 가소서. 선생이 남긴 토지 위에 후학들이 새로운 문학의 꽃을 활짝 피우겠나이다.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 최참판댁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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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 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 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후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 <토지> '서문' 몇 토막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누구인가?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 경남 충무시 명정리에서 박수영(朴壽永)씨의 장녀로 태어나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1월 30일에는 김행도(金幸道)와 결혼했으나 1950년 12월 25일 남편과 사별했다.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김동리에 의해 단편 '계산'이 추천되었으며, 1956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에는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았으며, 1958년 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하면서 단편 '벽지', '암흑시대' 등을 발표했다.

1959년에는 장편 '표류도'를 발표, 제3회 <내성문학상>을 받았으며, 1962년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1963년에는 장편 '파시'를, 1965년에는 장편 '녹지대'를 발표했으며, 장편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단편 '집', '인간', '평면도', 연작 '환상의 시기'를 발표했으며, 수필집 <Q씨에게>를 펴냈다. 

1968년에는 단편 '우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을 발표했으며, 1969년부터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1969. 9∼1972. 9)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단편 '밀고자'를 발표했으며, 장편 '창'을 연재했다. 1972년에는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받았으며, '토지'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1972. 10∼1975. 10)했다.

1974년에는 장편 '단층'을 발표했으며, 1977년 '토지' 3부를 <독서생활>(1977. 1∼1977. 5)과 <한국문학>에 연재(1977. 6∼1978. 1)했다. 같은 해 수필집 <호수>, <거리의 악사>(민음사)를 펴냈다. 1979년에는 박경리 문학전집 전16권(지식산업사)을 펴냈으며, 1980년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다.

1983년에는 '토지' 4부를 <정경문화>에 연재(1983. 7∼1983. 12)했으며, 1985년 수필집 <원주통신>(지식산업사)을 펴냈다. 1987년에는 '토지' 4부를 <월간경향>에 연재(1987.8∼1988.5)했으며, 1988년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를 펴냈다. 1990년에는 제4회 <인촌상>을 받았으며,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을 펴냈다.  

1991년 8월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92년 9월 1일부터 '토지' 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장편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나남출판)을 펴냈다. 1994년에는 <박경리의 원주통신-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문학선 <환상의 시기>, <가을에 온 여인>(나남출판)을 펴냈으며, 같은 해 8월 15일 집필 25년 만에 <토지>를 탈고했다.

같은 해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0월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올해의 여성상>을, 12월에는 유네스코 서울위원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1995년 3월에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객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현대문학사)를 펴냈다. 

1996년 3월에는 제6회 <호암상예술상>을, 4월에는 칠레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메달>을 받았고, 5월에는 토지문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1997년에는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사단법인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맡았다.

1998년에는 토지문화관을 착공, 건립한 뒤 1999년 6월 9일 개관했다. 1999년에는 장편 <표류도>(나남출판)를, 2000년에는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을, 2007년에는 <가설을 위한 망상>(나남출판)을 펴냈다.


태그:#작가 박경리, #토지, #최참판댁, #토지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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