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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 봄이라고 하더니 마치 한여름 같다. 벌써 사흘 째다. 오늘도 아침나절엔 빗방울이 일더니 낮부터는 푹푹 찐다. 털갈이를 할 때도 멀었건만 날씨마저 날 괴롭힌다. 낮엔 덥고 밤에 춥고,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날개 달고 하늘을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날도 더운데 이놈의 진드기들은 도대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앞 다리로 벅벅 긁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 떨어지는 놈은 내 피를 잔뜩 빨아 먹은 놈이다. 나쁜 녀석! 우리 주인님께서 아침에 진드기를 잡아 주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몇 마리나 들러붙었다.

 

산촌 생활에서 진드기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놈들은 풀에 붙어 있다가 내가 지나가면 잽싸게 무임승차를 한다. 내 몸에 붙어 여기저기 공짜 구경을 하는 것이다. 피나 빨아 먹지 않으면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걷거나 뛰는 중에도 녀석들은 왕성하게 피를 빤다.

 

아, 이럴 땐 차라리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 그러면 적어도 진드기의 공격이나 인간들로부터 이런저런 핀잔을 받지는 않을 것 아니던가. 그러나 내게는 날개가 없다. 왜 견공에게는 날개가 없는 것일까. 조상이 원망스럽다. 조상님들께서는 왜 날개 단 견공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땅개'가 되었단 말인가. 

 

오전엔 개장수가 마을을 다녀갔다. 개장수는 쇠철망이 달린 트럭을 몰고 다닌다. 개장수는 가끔 마을로 온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그 횟수는 늘어난다. 그가 모는 트럭엔 우리의 동료들이 많이 실려 있다. 동료들은 울 힘도 없는지 작은 철창 안에서 헉헉거리며 혀를 빼물고 있다. 불쌍한 동료들.

 

"흑염소~ 삽니다~ 개~ 삽니다!"

 

트럭이 집 앞을 지나갔다.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트럭을 따라가 보지만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개장수가 트럭을 따라오는 날 보며 휘파람을 휙휙 분다. 저런, 미친… 야, 인간아. 난 암놈이 아니고 수놈이다. 아무나 보고 휘파람 불지 마라. 역겹다. 우리는 인간처럼 아무 때나 암놈을 찾지 않는다. 그러니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 듣는 거다.

 

트럭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온다. 트럭은 마을 끝까지 올라갔다가 잠시 후에 내려왔다. 한 마리를 더 실었다. 어, 저 녀석은 기침쟁이 할머니네 개다. 목줄에 묶여 고생만 하더니 드디어 팔려가는구나. 눈물 난다. 저 녀석 아직 두 살도 되지 않았는데, 어린 나이에 정말 안 됐다.

 

개장수는 동료들은 보신탕 집에 판다고 했다. 어느 집에서는 영양탕이라고도 한단다. 우리가 그렇게 맛있나? 우리의 몸이 인간들에겐 보신이 된다니 웃긴다. 몸 보신용이라면 대접을 잘해야지 똥개 취급해서야 되나. 하긴 똥개가 더 맛있다며 달려드는 게 인간들이니 할 말도 없다.

 

며칠 전 고개 넘어 기와집에선 작은 발바리 녀석이 누렁이가 잡혀갈 때 덤으로 잡혀간 적도 있다. 개장수가 누렁이를 사면서 "저 작은놈도 끼워 주세요, 저런 놈은 집도 못 지키고 밥만 축내요"라고 하자 주인이 "아유, 그냥이라도 가져가신다면 드리죠, 덩치도 작은 놈이 밥은 얼마나 처먹는지 그냥 버릴까 했는데 잘 됐네요"하며 덤으로 주었다.

 

벌써부터 팔려가는 동료들 "아, 불쌍하다"

 

인간들은 동료들을 삶을 때 작은 개 한 마리씩 끼워 삶는다고 했다. 오히려 작은 개가 맛있다는 인간도 있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작은 개들도 죽어간다. 개 같은 인생들이다. 그럴 땐 누가 개가 누가 인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동료들이 트럭에 실려 골짜기를 빠져나간다. 불쌍한 것들. 주인 잘못 만나더니 결국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적어도 우리 주인은 날 보신탕 집에 팔아넘기지는 않는다. 나는 주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주인은 우리가 가진 견권을 보장해준다.

 

각자의 임무가 다르기에 그 일도 보장해준다. 나는 주인님의 집을 지키는 게 임무이다. 그러하니 집에 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 허락을 맡아야 출입이 가능한 것이다. 주인은 날 믿고 외출도 하고 방에서 글을 쓴다.

 

집에 오는 인간이라고 내게 다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인간은 내가 자기에게 짖었다는 이유로 화를 막 낸다. 웃긴다. 개가 짖는 것이 당연한 건데 짖는다고 뭐라 그런다. 어떤 인간은 나를 발로 차거나 "개새끼야, 시끄러!"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럼 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한다.

 

인간들은 웃긴다. 짖는다고 뭐라 그러고 짖지 않는다고 뭐라 그런다. 무식한 인간들이다. 그러려면 뭐하러 개를 키우나. 지구상에서 개를 멸종시켜 버리지. 하긴 그런다고 우리가 멸종되겠는가. 지금껏 역사를 이어나간 조상들을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지. 

 

견공을 대하는 데 있어 인간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를 '먹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는 우리를 반려자로 생각한다. 우리에겐 후자의 주인을 만나는 게 복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자의 주인을 만난다.

 

우리를 반려자로 생각하는 인간들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잘 준다. 목욕은 물론이고 함께 여행도 간다. 손톱도 깎아주고 염색도 한다. 부잣집이나 아파트에 사는 동료들의 팔자다. 하지만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 우리를 구속시키는 엿 같은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식용으로 생각하는 인간들 집으로 가는 견공은 팔자가 꽝이다. 그런 집에 가면 목줄에 묶여 똥개처럼 자라다가 주인에게 잡혀 먹거나 개장수에게 팔려간다. 그런 집은 개를 팔고 또 다른 개를 산다. 그리고 키워서 또 판다. 돈벌이 수단으로 동료들이 이용당하는 것이다.

 

나 같은 수놈은 덜 하지만 암놈은 실컷 새끼만 낳다가 폐기된다. 새끼를 낳아도 몇 달만 지나면 다 팔려간다. 그런 인간은 모성애를 느껴볼 시간도 주지 않는다. 인간세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필시 난리가 날 일이다. 

 

어제 오후엔 아랫집 며느리가 집 앞을 지나가기에 꼬리를 흔들며 "어디 가세요? 어디 가세요?" 물었는데 따라다니며 짖는다고 화를 막 냈다. 내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반갑다고 그런 것인데 내 뜻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온 것이다.

 

"이 망할 놈의 개새끼 팔고, 집도 팔고, 이 마을에서 떠나세요!"

 

며느리가 할머니께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가 난 할머니가 "누구 보고 이사를 가라 말라 해? 지가 이장이여!" 하고 대꾸했다. 나 때문에 아랫집 며느리와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싸움을 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짖는다고 때리고 짖지 않는다고 때리고 "인간들 개판이네!"

 

근데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디 가냐고 묻는 것도 죈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게 더 좋단 말인가? 개들이 안면 몰수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 일로 할머니와 주인님이 말다툼했다. 할머니는 나를 개줄에 묶던지 팔아먹던지 양단간의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개 때문에 남에게 싫은 소리 듣기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님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감격스러워 눈물을 펑펑 쏟았다.

 

주인님은 내가 어릴 적부터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다가 떠나'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동안 몇 번 죽을 뻔 했지만 주인님 때문에 살아났다. 덕분에 내 나이는 올해로 다섯 살을 맞이했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30대 중반의 나이다. 그러니 날 어린애 취급하면 안 된다.

 

할머니와 주인님이 말다툼을 하는 것은 다 나 때문이다.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난 잘못이 없다. 주인님이 아끼는 날 팔고 이 동네에서 이사 가라고 한 게 잘못이다. 텃세도 아니고 이사를 가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내참. 이러니 시골 인구가 자꾸만 줄지.

 

아랫집 며느리는 내가 자기네 밭을 밤마다 지켜주는 걸 고마워하지 않는다. 나는 밤마다 아랫집 밭을 지켜주기 위해 목이 쉬도록 짖는데 그런 고마움에 대해선 입을 싹 씻는다. 내가 아니라면 아랫집 밭은 고라니나 멧돼지로부터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자니 공연히 슬퍼진다.

 

할머니와 다툰 주인님은 친구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집을 떠나며 내게 "따라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했다. 지은 죄도 있는 듯싶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주인님을 배웅했다. 나도 가끔은 그런 정신은 있는 것이다.

 

밤 시간 주인님이 돌아왔지만 나는 예전처럼 버선발로 마중을 나가지는 않았다. 주인님이 마당에 들어서면서 나를 찾았다.

 

"낑낑아, 어디 있니?"

 

나는 그제야 주인님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다.

 

"내가 널 어떻게 팔겠니.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 마라."

 

주인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웠다. 오늘밤은 아랫집 밭 지켜주지 말고 잠이나 푹 자야겠다. 나도 한다면 하는 견공인 것이다.

 


태그:#견공, #개장수, #보신탕, #영양탕, #삼복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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