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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이름 부르는 소릴 들어본 게 언제인 듯싶습니다. 더구나 시골에 묻혀 살다보니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야 불러줄 사람이 없습니다. 행여 동네 사람들한테 ‘윤씨’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그냥 쿵쿵 저려옵니다. 사이버 공간에선 저마다 별난 닉네임으로 통하니 이름을 듣기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진짜 이름은 가슴 속에 묻어놓고 빈 껍데기만 빙빙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공연한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일까, 원고청탁, 우편물에서나마 이름을 발견하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대신 손아랫사람이나 제자들을 만나면 가능한 이름을 불러줍니다. 순간, 상대방 목울대에서 ‘깜짝이야’ 숨소리가 가까이 다가옴을 금세 감지할 수 있습니다.  

 

들꽃들도 이름 부르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농사일을 하다 심심할 때나 피곤이 들면 꽃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봅니다. 그러면 ‘나, 여기 있어요’ 예서 불뚝 제서 불뚝 여린 꽃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꽃들도 사람처럼 어릴 때 이름을 불러야 앙증맞고 귀엽게 다가섭니다. 작은 짐승들은 부를수록 솜털이 보시시 일어나 단내가 풍겨 나옵니다.

 

앵초는 꽃말이 ‘이른 봄의 슬픔’으로 시집가기 전에 죽어버린 소녀의 슬픈 운명을 뜻합니다. 어린 소녀의 보송한 솜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그런지 지금 보아도 가엽고 시리게 피어납니다. 그러므로 앵초 앞에선 결혼 이야길 절대 꺼내서는 안 된답니다. 노처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언제 국수 먹게 되느냐’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것과 똑 같습니다.

 

처녀치마는 수줍어 그늘과 습기가 많은 응달에서만 피어납니다. 행여 남자들이라도 나타나면 부끄러워 치맛자락을 방석처럼 둘둘 말아 깔고 앉아있다가도 모른 척 한 쪽 눈을 감아주면 치마를 살짝 들어올립니다. 어쩌다 해님이라도 찾아들면 얼굴엔 화색이 돌아 보라색 치마폭을 활짝 펴 보입니다.

 

봄엔 노란 꽃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부드럽고 따사로운 색상이 필요합니다. 동의나물도 노랗습니다. 연한 녹색 꽃잎 바탕에 황금빛으로 반짝여 입금화(立金花)라 부르기도 합니다. 잎은 심장을 닮아 오므리면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을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나물이라고 함부로 따먹으면 큰 일 납니다. 곰취를 닮아 톱니처럼 물결 모양으로 주름이 잡혀 윤기가 돌아 매끄럽지만 되알진 독(毒)성을 품고 있습니다. 독이나물이라는 별명도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독이>동이>동의를 생각하면 잔잔한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가끔 양지쪽 산비탈에서 삐악삐악 병아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노란 조동이를 한 제비꽃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러브 콜 멜로디입니다. 시골사람들은 이 꽃을 ‘병아리 꽃’이라 부릅니다. 노랑제비꽃은 꽃말이 ‘겸양’이며 농촌의 행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병아리 꽃은 시골 처녀가 봄바람 냄새에 주체를 못해 몸살을 앓다 급기야는 꽃바구닐 껴안고 들판으로 달려 나오는 봄 처녀 꽃입니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노랑꽃 저만치 기웃대는 그림자는 누구일까요.

 

앵초, 처녀치마, 동의나물, 노랑제비꽃 이름을 부르다 보니 봄볕이 저만치 기울고 있습니다. 뱃속에서 아까부터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들려옵니다. 꽃구경도 식후경, 어서 뱃속을 채우고 하우스 속 고추 모종에 물이나 흠뻑 줘야할까 봅니다.

 

누가 나의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면, 나도 그에게로 가서 한 송이 봄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싶은 오늘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북집 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클릭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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