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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인간의 모든 역사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시대였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은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를 회고하며 "20세기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세기에 점철된 전쟁의 규모와 빈도와 길이 모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대의 기근에서 조직적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그 세기가 낳은 인류재난의 전대미문의 규모로 보더라도, 기록상 가장 살인적인 세기였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라고 그 '살인적인' 20세기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지배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민중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사였다. 분단, 전쟁, 독재를 겪는 동안,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국가폭력>은 한국 현대사를 지배한 국가폭력을 되돌아보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성찰하고자 하는 책이다. 책세상문고 시리즈로 출판되어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이나 작은 책이지만, 안에 담긴 국가폭력의 실상은 너무도 끔찍하여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반공주의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변신하여 오직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사용되었고, 학교는 아이들이 혹 의심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하는 기관이었다. 한국전쟁은 빨갱이 콤플렉스를 널리 퍼뜨리기에 제격이었고 보수언론은 국가의 나팔수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땅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면 누구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공안정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국가보안법이란 국가의 권력유지를 위한 최고의 수법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아래 무조건 빨갱이가 되었고, 심지어는 국가가 사건을 날조해 빨갱이를 생산했다. 도무지 이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광란과 야만의 시대였고 '빨갱이'란 딱지에 국민들은 물론 지식인까지 침묵을 지키는 비겁한 시대였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다 빨갱이로 둔갑하는 괴상한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차라리 전체주의(파시즘)국가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에는 지난날 국가폭력의 악령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최소한의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보안법은 어처구니없는 법률이란 걸 알고 있다. 이건 세계 보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시대에 맞추어 변절을 거듭한 독재자에게 기념관을 세워주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살아보세' 경제부흥의 광기에 매몰되고 말았다. 독재를 했든 착취를 했든 경제만 살렸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인간의 존엄이 매몰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자부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과거 5공 정권의 백골단을 연상케 하는 체포전담조를 만들고, 경찰이 경부운하 반대 교수들의 성향 조사를 하고 나선 모습은 어쩐지 지난날 끔찍한 국가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벌써 '신(新)공안정국'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반대하는 의견이라 해서 억압하는 정부는 민주주의보다 파시즘의 모습에 가깝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지난날 역사를 배우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성찰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폭력적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온전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덧붙이는 글 |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국가폭력, 조현연 지음, 책세상, 4900원.


한국 현대정치의 악몽 - 국가폭력

조현연 지음, 책세상(2000)


태그:#국가폭력, #민주주의, #박정희, #반공주의,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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