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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원종철(62)씨는 고등학생이던 1965년부터 대학생이던 1971년까지 서울 서쪽 끝 난지도를 찾았다. 당시 원씨가 살던 집은 동대문구 청량리였다. 주말마다 사진기를 둘러멘 채 버스를 타고 난지도를 찾았다. 당시 난지도는 버스 종점이었다.

 

작가는 80만평 섬에 살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사진 속엔 난지도를 찾는 이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 정경, 긴 노를 저어서 난지도로 향하는 사공, 물 빠진 샛강 위로 오가던 우마차, 큰 짐지게를 짊어진 아버지, 배를 기다리는 소년원 아이들, 작품 사진을 찍으면 될 듯한 포플러나무길 등 30~40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작가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입사한 뒤 난지도를 잊고 있다가 2002년 월드컵 소식을 들으면서 30여 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난지도를 기억해냈다.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홍보팀 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곧장 난지도 사진전을 기획하면서 오래된 사진첩을 들추기 시작했다. 2002년 4월에 마련한 사진전 '꿈꾸는 섬 난지도'는 그렇게 마련됐다. '꽃섬'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섬 난지도는 1978년부터 서울시 쓰레기가 쌓이면서 오염과 악취의 대명사가 됐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난지도는 또 한 번 변신한다. 2001년 12월 월드컵주경기장이 완공되고, 2002년 5월 1일 월드컵공원이 개장하면서 서울시 대표 공원 중 하나가 됐다.

 

불과 40여 년 만에 난지도는 너무 큰 변화를 겪었다. 세월이 지나면 한 때 이곳이 거대한 쓰레기산이었고, 그 이전엔 재첩을 잡던 맑은 섬마을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잊을지 모른다. 아니 섬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혔다. 너무도 빨리.

 

난지도가 있었던 동네를 지금은 상암동이라 부른다. 곳곳에 대형건물과 첨단건물이 올라서면서 부단하게 옛 기억을 지우는 동네. 하지만 맑은 물이 흐르던 섬마을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토박이들은 30여년 된 작은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동네를 기억하고 있다. 

 

1960~70년대 재첩을 잡고 땅콩을 길렀던 섬 난지도

 

 

상암동은 서울에 있는 여러 동네 중에서 자전거로 가장 접근하기 좋은 곳이다. 한강 본류와 불광천 자전거도로에서 나오면 바로 상암동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지류인 홍제천 자전거도로에서도 멀지 않다.

 

지금 상암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 두 가지는 월드컵공원과 디지털미디어시티(DMC)다. 하지만 생긴 지 10년도 채 안 된 두 가지만으로 상암동을 설명한다면 상암동 역사는 너무 얄팍해진다.

 

상암동은 자연촌락인 수상리(水上里)와 휴암리(休岩里)에서 각각 한 자씩 따왔다. <동국여지비고>에 보면 상암동은 수암리계(水岩里契)·수생리계(水生里契) 지역으로 성 바깥이었다. 한강엔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 해서 '꽃섬' 또는 오리가 물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오리섬이라고 불리던 난지도가 있었다.

 

육지가 되기 전 난지도 크기는 80여만평. 여의도가 89만평이니 상당히 큰 섬이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경조오부도>, <수선전도>에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중초도中草島'라고 기록돼 있고, 오리가 물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오리섬 또는 '압도鴨島'라고 불리기도 했다.

 

쓰레기매립장이 되기 이전엔 수수와 땅콩, 각종 채소를 많이 기르던 땅이었다.

 

난지도 역사를 듣기 위해 원종철 작가를 찾았다. "회사가 상암동에 있다"고 했더니 "아직도 수색역 옆 굴다리가 있냐"고 묻는다. "여전히 있다"고 말했더니, 흐뭇한 표정이다.

 

원 작가는 2002년 난지도 사진전을 앞두고 상암동 토박이들과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노인정에서 고장 역사를 꿰고 있는 어르신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사진전에 찾아와 사진을 보면서 증언한 이들이 여럿이었다. 그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전 열기 전에 날마다 노인정 찾아갔어요. 70~80대가 대부분이었죠. 다 자기 사진이라고 하더라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사진전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저 분이 우리 아버지인데 벙어리였다고 하면서 펑펑 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진 속 코흘리개가 자신이라면서 웃기도 했고. 가족을 데리고 몇 번이나 온 사람도 있어요."

 

 

원 작가는 난지도에서 YMCA가 운영하던 삼동보육원 아이들을 만났고, 재첩을 잡던 아이들을 만났다. 야외활동 나온 대학생, 일하는 농부, 낚시하는 어르신, 벌거벗고 수영하는 어린이도 만났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동네사람들을 찍으면서 그 또한 어느새 난지도 사람이 된 듯했다.

 

작가는 사진 하나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작가에게 가족이나 이웃이었다.

 

"저기 사진 속에 백운사진관 보이죠. 아들이 지금 충무로에서 카메라 수리상을 하고 있어요. 짐을 인 여자 두 명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여동생이 찾아왔어요. 자기 학교 보내려고 언니 두 명이 일찍부터 일을 했다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많이 울었지. 동네 젊은이들은 월남전 가서 많이 죽었더만."

 

원씨에 따르면 난지도 쓰레기의 대부분은 연탄이었다. 쓰레기를 처리하면 돈이 됐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넝마주이들이 싸우기도 했다.

 

원씨는 쓰레기 매립장 시절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 시절만 없었다면 지금 난지도는 훨씬 아름다운 공원이 됐을 거라고 확신했다.

 

"에버랜드가 뭐야. 더 좋았겠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때 연탄을 안 땔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딘가엔 버려야 했으니까."

 

사진 속 풍경은 불과 한 세대 전인데도 무척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최초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거대한 송전탑(난지도 매립장이 두 개 봉우리로 갈라진 이유가 바로 이 송전탑 때문이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지인 수색철교, 수색역 앞 그레이하운드 버스, 일본인이 만든 거대한 얼음공장 등.

 

원종철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덧 1960~70년 전 그 시절 난지도로 돌아갔다.

 

난지도 조립주택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화재 일어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상암동엔 오래되거나 임시로 만든 집들이 많았다. 난지도엔 철판과 합판으로 만든 조립주택단지가 있었고, 널판지와 비닐로 얼기설기 만든 움막집도 있었다. 심지어 6대째 이어온 초가집까지 있었다. 서울시에서 유일했던 초가집은 수색-난지도간 도로가 뚫리면서 사라졌다.

 

그 시절 풍경을 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 상암동 482 난지도 쓰레기매립장내 움막에서 잠을 자던 김용덕(65·폐품수집원)씨와 김씨의 부인 오재임(60)씨가 쓰레기를 버리던 평택운수 소속 경기7하1329호 10t덤프트럭(운전사 김태섭·25)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흙더미에 깔려 숨졌다.…김씨부부는 강원도 춘천에서 1남3녀와 함께 살다 82년 부부만 난지도쓰레기처리장으로 옮겨와 폐품수집을 해왔다." -<국민일보>(1990년 1월 17일) 

 

각종 신문에 난 자료를 살펴보면 1990년대 초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엔 1100여가구 4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1984년에 만들어진 집들은 철판과 합판으로 만든 조립주택이었다.

 

침수 피해도 잦고 화재도 자주 일어났던 이곳을 주민들은 묵묵히 지켰다. 1990년대 초반 사고일지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 4월 4일 쓰레기제1매립장 반액체상태 산업폐기물을 막는 둑 터짐

-1990년 4월 4일 쓰레기제1매립장 쓰레기더미 붕괴. 교통 2시간 마비

-1990년 9월 15일 폭우로 쓰레기매립장 1100여가구 침수(1984년, 1987년 이어 세 번째)

-1991년 1월 13일 쓰레기매립장 판잣집 화재. 1명 사망

-1991년 5월 21일 쓰레기종합처리장 메탄가스 폭발. 1만2천여평 규모 산업폐기물처리장 전체와 일반쓰레기매립장 일부 번짐

-1992년 4월 28일 쓰레기매립장 조립주택 화재. 19가구 전소. 이재민 80여명 발생

-1993년 3월 20일 쓰레기매립장 조립주택 화재. 72가구 전소. 2500여명 한밤 대피. 1명 사망

 

물에 기름이 뜰 정도로 우물물 상태도 심각했다. 원종철씨에 따르면 한 여름 밥을 먹을 때는 밥에 붙은 파리를 함께 삼켜야 할 정도로 오염상태가 심각했다.

 

이들의 주수입원은 쓰레기처리. 하지만 1992년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에 새 쓰레기매립장이 조성돼 이전하면서 난지도 쓰레기장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1930년대 목조주택 있는 마을... 오랫동안 개발과 거리 멀어

 

지금 상암동엔 대부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지만, 상암초등학교 건너편 마을과 매봉산 기슭에 오래된 집들이 조금 남아 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이 일대를 거닐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풍경을 보게 된다. 옥상엔 장독대가 있고, 골목엔 야외신발장과 음식 그물망이 걸려 있다. 주민센터 앞 너른 공터에선 닭이 뛰어놀고 있다.

 

특히 상암동 관사마을은 서울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목조주택 마을이다. 상암월드컵7단지 삼거리에 서면 언덕에 보이는 마을이다. 193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 10여채가 모여 있다. 해방 이전 일본군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지금 사람은 모두 떠났고, 빈집만 남아 있다. 이미 터 닦기가 끝난 공터에 빈집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쓸쓸하게 보인다.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니 최근까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에스에이치(SH) 공사가 이 곳에 아파트 3천 세대를 짓기로 했고,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다.

 

소박한 동네 풍경은 이발소 모습과 일치한다. 붉은 색 바탕벽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문만 덩그러니 있는 제일이발소. 창문도 없고 아무 장식도 없다. 검은 바탕에 흰색과 빨강색으로 이름을 새긴 진이발관. 이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행운을주는이발사 등. 이발소가 꽤 많은 편이다.

 

새마을이용원과 근대화삼거리수퍼체인이란 상호에선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울려퍼지던 그 때가 생각난다.

 

동네엔 '모모분식'이란 4년 된 식당이 있다. 주인은 난지도 조립주택에서 줄곧 살다 최근 이사를 했다. 난지도가 쓰레기산이었을 때는 온 집안이 파리로 들끓었단다. 난지도에서 30여년을 살았다고 하니, 쓰레기산이 생길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줄곧 살았던 셈이다.

 

'원조할머니떡볶이'는 이곳에 자리잡은 지 30년이 넘었다. 가장 비싼 음식이 볶음밥 등 밥 종류로 3천원이다. 나머지 김밥은 1000원, 순대 2000원, 떡라면 2000원이다. 밀가루 값이 올랐지만 가격은 그대로다.

 

원조할머니는 일흔을 한참 넘겼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젊게 보인다. 벽에 재즈가수로 보이는 사람 사진이 걸려 있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들이라면서 자랑을 하신다. 할머니에게 이 곳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할머니 짐 들어주는 할아버지... 이것이 정 아닐까

 

 

월드컵주경기장 옆에 있는 조그만 언덕이 매봉산이다. 가장 높은 곳이 95m. 채 100m가 되지 않는다.

 

매봉산 기슭 마을을 걸어 다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할머니를 만났다. 이 동네에 임시 가옥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동네 전체가 임시 가옥이었다"고 대답하신다.

 

한창 아파트를 짓기 위해 터 닦기를 하고 있는 곳 옆에 종이상자와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은 집을 보았다. 할머니가 한 분 앉아 계셨다. 말을 붙여보았다.

 

할머니 이름은 이옥분. 올해 나이가 84세다. 난지도가 쓰레기산이던 시절에도 이 곳에 살았고, 재첩을 잡던 시절에도 살았다. 처녀 때부터 살았다고 하시는데,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동네 근처서 종이상자와 빈병 등을 주워서 생활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제 못하게 됐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집을 헐 계획이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곳은 전세 700만원. 집을 허물고 나면 서울엔 딱히 갈 곳이 없다. 큰아들이 있지만 가족이 여덟 명. 할머니는 "갈 곳이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몸도 좋지 않다. 고향 안면도에도 올해는 가질 못했다. 종이상자를 모으는 것도 이젠 힘겹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포대 두 자루를 떨구고 간다. 할머니 몸이 불편한 걸 알고 일부러 쓰레기를 모아서 놔두고 가시는 거다. 내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날 동안 세상을 봤을 두 분은 간단한 인삿말만 하고 헤어졌다. 이게 정인가 싶다.

 

할머니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집에 함께 사는 할머니가 83세란다. 동네엔 10여명 정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여쭤봤더니 옷매무새를 만지더니 살짝 웃으신다.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셨지만 나는 괜히 마음이 아팠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온통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전력질주를 하듯이 빌딩을 세우는 동네 상암동. 몇 년 뒤 "상암동을 아냐"고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그 땐 "아 아파트 많고 고층 빌딩 많은 곳"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태그:#상암동, #골목, #자전거, #미니벨로,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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