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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을 내려온다. 그냥 내려오기 멋쩍어 백련암에서 해인사로 내려가는 옛길이 있을까 하여 찾아본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서 보니 우측으로 난 아주 좁은 오솔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자 희랑대가 나온다. 희랑대에서 돌계단을 내려와서 해인사 가는 길로 찾아든다.

 

이윽고 해인사 일주문 앞에 도착한다. 삼거리에서 용탑선원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1945년에 창건한 이 암자는 해인사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자다. 이 길은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뻗은 길을 걸어가자 금세 암자에 닿는다. 용탑선원은 계곡 건너편에 있다.

 

계곡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크고 튼튼한 시멘트 다리와 외나무다리. 커다란 나무의 몸통을 켜서 그대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 다리 옆엔 '이 다리를 건너면 불심 깊은 불자는 업장이 소멸된다'라고 쓰여 있다. 나는 불자가 아니니, 건너 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란 말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 말에 의지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간다.

 

용성 스님과 그의 제자 고암 스님

 

문짝 없는 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석탑 앞에 앉은 돌사자들만이 나그네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넌 도대체 어느 절 사자를 본뜬 짝퉁이냐? 그러는 넌 누구의 짝퉁인데?

 

돌도 오래되지 않으면 촐싹댄다. 탑 좌측으로 눈길을 돌리자, 용탑선원과 감로당이 앉아 있다. 꽤 늙은 건물인데 밭은 기침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묵묵할 뿐이다. 아마도 이 암자에서 맨 처음 지어진 건물인가 보다.

 

이 암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셨던 용성 스님의 사리탑을 관리하고자 지은 것이다. 스님께서 입적하고 나서 5년 뒤의 일이었다.  

 

민족문화 선양과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산 용성 스님

 

용성(1864~1940) 스님은 전북 남원(현재의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났다. 법호인 용성은 남원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6세 때 해인사에서 화월(華月)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3·1운동 때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에 속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면서 대처승의 법통 계승을 인정하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했다.

 

경봉 스님이 여러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 <삼소굴 소식>에는 용성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 있다. 그 속엔 용성 스님이 조선 승적을 스스로 없앤 까닭을 밝힌 편지도 들어 있다.

 

"교생(敎生)은 승적을 제거하였으니, 그 까닭은 조선 승려는 축처담육(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음)하고, 사찰 재산을 진모(써서 모두 없앰) 함에 대하여 승수(僧數)에 처할 생각이 돈무한 원인이외다."

 

용성 스님은 서울 종로에 대각사라는 도심 포교당을 세워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지향했다.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대각교운동을 펼쳐 나갔다. 나아가 승려의 나태와 무노동을 병폐로 간주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선농(禪農) 일치를 부르짖었다. 구체적 실천을 위해 만주 선농당과 함양 화과원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용성 스님은 그렇게 조국·민족과 동떨어진 산중 불교가 아니라 민중과 고난과 아픔을 함께하는 불교를 추구했다.

 

인욕과 자비의 화신 고암 스님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서 태어난 고암((1899~1988) 스님은 1916년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혜월·만공·용성·한암 등 당대 최고 선지식들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지낸 후, 38년 용성스님에게서 견성을 인가받고 전법계를 받았다.

 

1967년 이후, 세 차례나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80년에는 용성문하의 스님을 대표하는 용성문장에 취임했다. 88년, 용탑선원에서 세수 90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평생 자비보살의 무소유를 실천하신 스님이었다.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청정해진다(心淨卽國土淨)'는 법문을 자주 설하셨다고 전한다.

 

밤새 1백 대중의 신발을 다 닦아 놓으신 고암 스님

 

 

승려 시절, 이런 고암을 직접 지켜보기도한 고은 시인은 <만인보> 24권에서 고암 스님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젊은 날

짚신 하나 잘 삼으셨구나

길 가다

짚신 닳으면

짚신 삼아 신고

길 갔다

그렇게 길 가고 길 오고

어느새 삼천리를 돌았구나

(중략)

한밤중에 섬돌 신발들

아무도 몰래

다 닦아놓았구나

다음날 아침 그 신발 신는

1백 대중

한걸음 한걸음 한걸음이 새롭구나

 

- 고은 시 '고암' 일부 <만인보>24권

 

밤새 1백 대중의 신발을 다 닦아 놓으신 스님. 조계종 종정을 무려 3번이나 역임하고 전계대화상까지 맡으셨던 분이지만, 그의 하심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몇 년 전, 상주 남장사에서 지금은 직지사 주지로 계시는 성웅 스님에게서 자신의 스승인 고암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법당은 '칠불보궁'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이름 그대로 안에는 일곱 분의 부처를 모셨다. 한 보살이 오체투지로 절을 하고 있다. 절하는 모습 속엔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신심이 반영돼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깥벽에 그려진 벽화를 살펴본다. 비천상인가?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이만익 화백의 그림과 매우 흡사한 분위기다. 구름 위에 앉은 선인들이 젓대 등을 불어 음악 공양을 하고 있다.

입구에 지켜선 삼층석가사리탑은 1965년 고암 스님이 세웠는데 석가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바로 정면 산 아래엔 석조 미타굴법당이 있다. 산비탈을 깎아 지은 굴 법당이 있다. 법당 안 벽은 전부 석재로 마감했다.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보살 및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법당 옆 샘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신다. 물을 담아두기 위해서 파낸 것일까. 아주 큰 돌확이다. 수도꼭지에서 돌확으로 아주 가느다란 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다. 정신도 쉬지 않고 부서져야 한다. 저렇게 부서져야만 명징한 의식을 얻을 수 있다. 저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입적의 순간, 딱 한 번 선객 노릇을 하다

 

경내를 나와 용성 스님의 사리탑과 고암 스님의 부도가 모셔진 언덕으로 올라간다. 부도들은 용탑선원과 홍제암 사이에 있다. 암자 뒤에는 용성 스님의 선농일치를 생각나게 하는
꽤 너른 텃밭이 있다.

 

먼저 용성 스님의 부도탑과 비를 들여다본다. 1941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만해 한용운이 비문을 지었으며 일재 최종환이 글씨를 썼다. 앞에 있는 고암 스님의 부도와 비를 들여다 본다.

 

고은 시인께선 고암 '마니아'신가? 앞에서의 시 한 수로도 부족했던지 <만인보> 26권에 이르러 또다시 고암을 노래한다.

 

선방에서 사자후는커녕 사사로운 방을 한번도 외친 적도 없다
있는 듯
없는 듯하였다
또한 이름 내건 적도 없다
싱겁다 조용조용 걷는다
그렇게 걷노라면
어느새 보살들이 모여들어
오래된 도량을 이룬다
(중략)
임종 때
제자 효경 대원에게
누운 채 제 발 들어 보이고
누운 채 팔 들어 주먹 보였다
말없이 눈감았다

 

오직 그때만이 딱 한 번 선객 노릇이었다

 

- 고은 시 '다시 고암' 일부 <만인보>26권


하심(下心). 말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동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하심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자의식을 철저히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마음의 경지다. 고암 스님은 그렇게 자신을 낮췄다. 자신이 누구못지 않은 선객이라는 것조차 감춘 것이다.

 

위대한 스승과 스승의 입적 후에도 변함없이 받들던 제자가 함께 누워 있는 풍경.  죽음이란 본디 적막한 것이다. 그 적막을 두 사람의 우의가 따스하게 감싼다. 가야산 상왕봉보다 높은 정신의 두 봉우리가 여기 잠들어 있다.

 
 

태그:#가야산 , #해인사 , #용탑선원, #경남,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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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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