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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대충 정리가 끝났을 때쯤, 꼬냥이는 등 뒤에 달라붙은 육중한 몸매의 몸살 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회에 쓰게 되겠지만 수많은 사건 사고로 얼룩진 이번 이사, 몸살군과의 만남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뼈 마디마디가 저릿저릿하고 식은땀은 줄줄, 그렇게 보드랍던 복댕이의 털도 살갗에 닿으니 수세미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기침은 쉴 새 없이 토해져 나오고 입맛도 뚝 떨어져 이틀간 아무 것도 입에 댈 수 없는 지경. 위장에서부터 역류해 올라오는 기침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까, 오장 육부를 목구멍으로 토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끔찍하군).

그러다 보니 머릿속엔 '뭐라도 먹어야 산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 사회면에 '혼자 살다 아사한 30대 여자'로 기사가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밥을 하려니 부엌 짐이 덜 풀린 상태고 배달을 시키려니 마침 찾아놓은 현금이 없었다. 이번에 이사온 집은 은행이나 현금지급기가 근처 시장에만 있는데, 그 '근처'라는 것이 걸어서 15분 거리인지라 도저히 이 몸을 질질 끄고 그곳까지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지갑을 탈탈 털어 나온 돈이 600원. 젠장! 평소에 미리미리 좀 찾아둘걸. 그 날 따라 눈발이 비치는 매서운 날씨. 라면이라도 하나 사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빌빌대며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슈퍼는 이미 전쟁터, 라면을 사수하라!

새로운 동네에서 처음 가보는, '마트'를 가장한 슈퍼. 앞으로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뿌릴 것인가!! 슬쩍 슈퍼 내부를 살펴보며 라면 코너로 향해 가장 저렴한 가격의 라면 중 하나인 '안심탕면'을 찾았다.

음?

이…, 이거 뭐야, 왜 700원이야?

휑-

잔돈 600원 들고 슈퍼 갔을 때의 기분을 아시는가. 가격표가 붙어있어도 혹시 10원이라도 더 나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600원에 맞게 마음을 세팅해 왔는데 그 물건이 없을 때의 당혹감! 그런데 이건 대놓고 700원이라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안심탕면 올랐나요?"
"이번에 라면값이 100원 정도 올랐어요."

헉, 그 사이에 100원이나 뛰다니,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져 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꼬냥이의 뱃가죽 너머에서 들려오는 위장의 소리. '먹어야 산다!'

"그… 그럼 안심탕면보다 싼 라면은 없나요?"

곧 죽어도 '폼생폼사' 꼬냥이 인생에 이런 대사를 칠 날이 올 줄이야.

"아, 있긴 한데 아까 다 나갔어요, 내일이나 돼야 물건 들어올 텐데."

이제 꿈도 꾸지 마라, 복댕!
▲ 복댕이의 고뇌. 이제 꿈도 꾸지 마라, 복댕!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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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이미 슈퍼는 전장, 사재기 전투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은둔형 꼬냥이 같으니라고! 라면값 오른단 소리 들었을 때 전투태세 갖추고 달려들었어야 했는데 지가 무슨 갑부라고 '100원 올라봤자~'라고 코웃음을 쳤으니 이런 패배는 정해진 순서인 건가.

복잡한 심경으로 찌질대며 대충 남은 라면들을 살펴보니 라면 중에서도 고급 브랜드 몇몇뿐이었다. 제길, 애초에 600원으로 살 수 있는 라면 따윈 있지도 않았어!

무방비 상태에서 받은 충격 탓일까, 또다시 위장을 끌어올리는 맹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쿨렁… 안녕… 우웨엑… 안녕히… 쿨럭… 계세…요."

이, 무슨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냔 말이다. 퀭한 얼굴의 여자가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와 라면 코너에서 '싼 라면' 찾다가 미친 듯이 기침하며 도로 나가는 꼴이라니. 슈퍼 아저씨의 애잔한 눈빛이 내 뒤통수에 꽂히는 듯 했다.

오기는 사람을 강하게 한다든가. 슈퍼를 나오는 순간, 이미 신은 내게 빌빌대지 말고 은행에 가서 현금 찾으라 강요하고 있었다(신 : 내가 언제? 쟤 무서워…).

내가 은행가는 길에 쓰러져 한 떨기 꽃(!!)이 되는 한이 있어도 오늘 기필코 장을 보리라!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단정치 못한 몰골에 산발한 여인, 그녀는 현금지급기 앞에서 알아듣지 못할 염불을 중얼거리며 마구 돈을 뽑아 제꼈다.

"내놔라, 내 돈! 어서 뱉어라, 라면 따위 다 먹어줄 테다, 그르릉.."

덜덜덜... 1천원짜리 라면이라니!

돈도 뽑았고 슈퍼에서의 굴욕도 있고 하니 기왕이면 좋아하는 라면을 사기로 했다. 죽으면 썩어질 몸, 먹고 싶은 건 먹고 죽겠다는 강한 의지! 꼬냥이가 즐겨 먹는 '무와 파와 마늘이 들어간 탕면'을 집어들었다.

음? 얼마? 이게 동그라미가 몇 개야? 1000원? 엥? 천원??!!!

후아…. 이건 뭐 라면이 나하고 싸우자는 거야? 정식으로 '무와 파와 마늘이 들어간 탕면'에게 결투신청을 받은 꼬냥이.

정말 낯설었다. 봉지 라면 하나에 천원이라니. 아니, 다른 물가가 오른 건 둔감한 꼬냥이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라면이 어디 그저 음식이던가. 돌도 씹어먹을 나이의 청춘들에 단돈 몇 푼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소중한 아이템 아니던가.

지금이야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하지만 초창기 글자당 10원 받을 때만 해도 하루 세끼 라면에, 그것도 안 되면 면과 스프를 반반 나눠 아침저녁으로 끓여 먹었던 값싸고 소중한 아이템이 라면이었다. 그 몇백 원으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끼니!

씁쓸한 마음으로 라면 한 상자를 샀다. 이미 몸살도 나의 혈압에 압사당했는지 잠시 소강상태. 낑낑대며 라면 상자를 들고 와 동생 놈들에게 전화를 했다.

"은경이랑 경훈이 데리고 누나 집으로 와."
"엇, 누님 왜요?"
"라면 몇 개씩 들고 가, 라면값 올랐대잖아."
"엉엉! 안 그래도 누님…. 장사 안 된다고 사장이 아르바이트비 미뤘는데 자장면도 500원이나 오르고 라면값도 오르고 굶어죽겠어요, 누님."
"알았다, 집들이 겸 자장면에다 탕수육 먹자."
"잇힝! 누님 최고! 저녁때 애들이랑 갈게요."

그날 저녁, 서울에서 자취하는 동생 세 녀석이 휴지와 세제를 사들고 왔다. 공부하는 놈 둘에 아르바이트는 하는데 월급은 항상 밀리는 놈.

"니들 끼니 걱정하면서 휴지는 왜 사들고 오냐."
"언니~ 배고파, 앙앙앙!!"
"누님, 탕슉탕슉, 자장자장!!"

근처 중국집에 탕수육과 자장면 네 그릇을 시켰고 역시 3500원이던 짜장은 4000원이 되어 있었다.

"언니, 이제 만만한 게 자장이란 말은 옛말이야. 우리 학원 옆에 백반집이 4000원이니 말이야."
"알바비는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고 큰맘 먹고 자전거 샀어요. 좀 멀어도 자전거 타고 다니려고요. 교통비라도 아껴야 밥 먹고 살 것 같아요."
"공부한답시고 부모님한테 생활비 받는데도 점점 쪼들려요. 제가 이 정도니 부모님은 더 하시겠죠."

에고고…. 단돈 100원에 먹먹해지는 가슴이라니. 녀석들이나 나나 허기진 건 몸보다 마음, 갑갑~한 마음이었다.


태그:#라면, #물가인상, #옥탑, #짜장면, #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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