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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마이뉴스> 김영조 시민기자의 출판기념회에 갔습니다. 김영조 시민기자는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추려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이지 출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취재 부탁을 받았지만 저에겐 정말 분에 넘치는 자리였습니다. 일개 피라미 시민기자가 대 선배님의 기념비적인 자리를 취재하니 그렇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주선한 김슬옹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후원회장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김영조 시민기자의 활동에 감사해 도움을 주게 됐다고 했습니다. 끝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그리고 맨 끝 뒷풀이 자리에서 도종환 시인의 ‘권주시’를 멋지게 낭송했습니다.

 

여러 분들의 축하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 영어 교육을 강화하는 현 정세를 비분강개하는 말들이었습니다. 이분들 속을 끓게 할 만큼 새 정권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외국인도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입니다. 우리만의 정체성은 숭례문처럼 온데간데없고 그나마 조금 움츠러 있던 약육강식의 논리들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이상규 원장은 일제시대의 식민지보다 더 무서운, 영어를 통해 우리 내면을 스스로 식민지화 하고 있는 현실을 질타했습니다. 모국어를 ‘살려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슬퍼합니다.

 

국립극장 예술진흥회 최종민 이사장은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우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교육을 시킨 일제 시대 교육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지난 2월 15일자 신문에도 비슷한 한탄의 소리를 읽었습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칼럼을 통해 “제 나라 말로 기본적인 의사 표현도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영어부터 가르치”려 하는 발상을 한탄합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는 이들을 ‘지켜나가게’ 연을 만들어나간 사람이 김영조 시민기자입니다. 김영조 기자는 “내가 만난 문화인 한 분 한 분에게 큰절을 하고 싶다. 그들 덕분에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다”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 분의 취재 노하우도 살짝 얻었습니다. 한 번 이런 분들 만나면 2시간이고 4시간이고 붙잡고 이야기한다고, 그러면 다들 속내를 드러낸다고요.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를 기사로 풀어준 것을 감사한다 했습니다.

 

이런 김영조 기자의 노력으로 문화인들의 커다란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600여 개가 넘는 기사만 보더라도 그 세세한 그물망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여느 출판기념회와 달리 김영조 기자의 출판기념회는 취재로 만나게 된 문화인들의 한마당 잔치로 꾸며졌습니다.

 

사실 행동 반경에 있어 ‘자유로운’ 시민기자의 장점은 취재를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자주 올린 미술 전시회 기사도 사실은 즐김(감상)이 전제됐습니다. 정확한 사실 관계에 관한 내용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매체는 지면상 제약을 크게 받기 일쑤여서 속풀이가 될 수 없지요. <오마이뉴스>의 많은 글 또는 기사들이 그런 속풀이 자리가 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김영조 기자의 책 소개는 다른 글에서 ‘즐기기로’ 하겠습니다.

 

공연은 제일 먼저 이승희님의 승무로 시작됐습니다. 고깔 쓰고 긴 모시 소매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을 언제 본 적이 있나 싶습니다. 마치 살짝 솟구친 한옥의 처마 지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엎드린 자세에서 시작된 춤사위가 피어나듯 솟기 시작하고 보폭이 넓어지면서 기운이 무대 위에 가득 차네요.

 

급기야 북채를 들고 북까지 울려댑니다. 배경음악만 없었다면 옷 스치는 소리만이 승무의 소리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배경음악으로 나온 국악 소리가 팔의 움직임을 거들어주는지도 모르지요. 마지막 절정 순간 이승희님은 흰 장삼을 벗습니다. 마치 번뇌를 벗듯 겉옷을 벗어 북 위에 얻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절을 합니다. 문득 승무가 불교 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삼 스님의 대금 연주 소리는 승무의 몸짓과 리듬을 같이 한 것 같았습니다.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오른쪽 팔이 불편하지만 받침대 도움을 받고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십니다. 한 손으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대금은 개량된 듯했습니다.

 

감기로 힘든 와중에도 맨바닥에 앉아 한쪽 어깨에 대금 앞부분을 받치고 약간은 구슬픈 가락을 품어냅니다. 예술은 솔직합니다. 그 장인의 속내와 솜씨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아픔이 묻어나기도 하고 한이 풀어져 내리기도 합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청맹(聽盲)’은 언제 그럴 수 있을지 요원할 뿐입니다.

 

다행히 문화는 그렇게 깊은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감상하는 이들의 이해도에 맞게 문화는 스펙트럼이 아주 넓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을 뿐이지요. 가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문화 감수성의 부재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문화의 좋은 맛을 알면 도를 지나친 마음이 제자리 근처라도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유지숙 명창과 제자들의 서도소리도 들었습니다. ‘자진난봉가’, ‘느리게 타령’, ‘사설난봉가’를 들었습니다. 품 넓은 고운 한복 입은 세 사람이 들어서니 무대가 가득 찹니다. 흥겨운 민요가락이 구성지게 흘러나옵니다. ‘사설난봉가’의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익히 아는 가사지만, 그 다음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20리 가서 불한당을 만나고 30리도 못 가서 돌아온다”로 이어집니다. 다행히도 해피엔딩이네요.

        

 

 

부자(父子)가 나와 대금과 장구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원장현님과 그의 아들이 그들입니다. 어쩐지 서로 닮았다 싶었는데 사회자가 언급해 줍니다. 원장현님의 아버님도 거문고를 연주하셨다 하니 3대가 우리 음악을 잇고 사십니다.

 

기타와 해금과 거문고, 장구가 어울려 하나가 된 ‘어울림’의 연주는 압권이었습니다. 서양 악기와 국악기가 그렇게 조화를 이룰 수 없고, 흥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금 켜는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 가야금의 기다란 품새도 멋졌습니다. 거칠 것 없는 기타 연주, 조용히 얼쑤 하는 장구 등 관객을 푹 빠지게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2부 공연까지 끝나고 김영조 기자가 찾아온 손님들과 인사하며 일일이 책에 사인을 합니다. 분신 같은 책들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전해집니다.

 

뒤풀이의 사회자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시민’을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무엇이냐고요. 맞추면 상품도 준다 했습니다. 누가 ‘씨알’이라 했습니다. 사회자는 ‘임자’라고도 했습니다.

 

기자는 더욱이 시민기자는 몸으로 적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건강한 글쓰기를 계속 바라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회자 분이 상품을 안 주시네요.

 

한꺼번에 우리 문화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에 가회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하도 좋은 구경을 많이 해서 배부르겠다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이 그런 자리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김영조 지음, 이지출판


태그:#김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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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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