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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광주 동초등학교 분교가 된 모교 광주 충효 초등학교 교정. 가장 왼쪽 교실이 내가 공부했던 6학년 교실이다.
 지금은 광주 동초등학교 분교가 된 모교 광주 충효 초등학교 교정. 가장 왼쪽 교실이 내가 공부했던 6학년 교실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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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 개선동이다. 조선시대엔 창평군 외남면(外南面)에 속했던 곳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단행한 행정 구역 폐합에 의해 개선동, 밖지실, 학미동 일부와 광주군 석제면의 덕의리 일부가 합해져서 학선리가 되었다. 학미동과 개선동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딴 것이다.

행정구역과는 달리 학교는 광주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 있는 충효국민학교로 다녔다. 면 소재지인 연천리에 있는 남면국민학교로 배정받아야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연천리까지는 십리 길이 넘었다. 그러나 충효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도 만만찮은 거리는 아니었다. 오리가 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혀 멀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해찰 거리가 많았던 것이다. 봄엔 숫제 얼굴을 온통 검정으로 떡칠하면서 '보리찜'을 해먹기도 하고, 가을엔 누렇게 익은 벼논으로 들어가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이 변두리 학교엔 도서관조차 없었다. 우리가 5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도서관이 생겼다. 봄 가을에 걸쳐 전교생이 방과후에 보리 이삭과 벼 이삭줍기를 다녔다. 그렇게 일 년 내내 모은 돈으로 책을 구입하고 교실 한 칸을 빌려 도서관을 열었던 것이다. 40년도 지난 옛일이지만, 지금도 전교생이 일렬로 죽 서서 벼 이삭을 줍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도서관 문을 처음 열던 날에 읽었던 <소공녀>라는 동화책에서 풍겼던 잉크 냄새가 아직도 코 난간을 간질이는 듯하다.

이렇듯 궁벽 산촌이나 다름없었지만 우리에겐 무등산을 실컷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지복이 주어졌다. 무등이란 말은 "부처의 경지는 높고 높아서 더불어 견줄 것이 없다"라는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나왔다고는 말도 있고, 또 절대 평등을 의미하는 '무등등(無等等)'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거룩한 뜻을 가진 무등산의 정기를 '무상대여'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기호민 선생님은 우리가 6학년 되던 해 영광군 군남 초등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그때는 사범학교 출신 선생님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범학교 부설 양성소에서 3개월 간의 과정을 거치면 교사로 임용되는 케이스가 병존하고 있던 때였다. 선생님은 양성소 출신이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실력도 탁월했고 무엇보다 열성이 넘치는 분이셨다.

한여름 해가 길 때는 저녁 8시가 넘을 때까지 수업을 계속했다. 과외에 대한 교육청의 단속이 심하던 때라 커텐을 내리고 나서 불을 켜고 몰래 '도둑 공부'를 해야 했다. 돈 한 푼 안 내고 반 전체가 과외를 받은 셈이었다. 당시는 중학교 경쟁시험의 열기가 어찌나 치열하던지 과외가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광주 시내 - 예컨대 수창국민학교나 서석초등학교 등 -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으면 한 해에 집 세 채가 생긴다는 말이 떠돌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공부가 끝나더라도 곧장 하학하는 법은 없었다. 30여 분에서 길게는 1시간 가까이 앞으로 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길고 긴 훈육시간이 이어졌던 것이다. 어린 우리가 밑도 끝도 없는 선생님의 장광설을 어떻게 전혀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이 가진 진정성이 우리들의 마음을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오리가 훨씬 넘는 하학길을 달빛을 동무 삼아 허위허위 걸어다녀야 했다. 거기에 그친 게 아니라 어떤 친구는 선생님 댁에까지 가서 늦은 밤까지 공부했다 한다.

마침내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월백설백한 겨울이 되자, 졸업이 다가왔다. 일주일쯤 졸업식 예행연습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라고 시작되는 답가를 연습할 때면 교실은 금세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울음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은 으레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울면 아이들 모두가 따라 울었다. 선생님이 눈물은 그만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는 사랑의 증표일 것이다.

졸업식 사진도 찍었다. 돈이 없어서 앨범은 만들지 못하고 반 전체가 한 장에 들어가는 흑백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다. 1967년 2월 10일, 마침내 졸업식 날이 왔다. 그 당시 졸업 선물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졸업장을 담을 수 있는 플라스틱으로 된 졸업장을 담는 통이었을 것이다. 축하 꽃다발 같은 사치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때였다. 더러 담장가에 핀 동백꽃 송이를 꺾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송가가 끝나고 마침내 답가 시간이 되었다. 노래는 첫 소절부터 제 갈 길을 잃고 흐느적거렸다. 답가가 끝남과 동시에 "내 새끼들아"라고 외치는 선생님의 절규가 터졌다. 영화 <페드라>에서 주인공 알렉시스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페드라"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을 연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결국 선생님과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껴안고 울었다.

그러나 이별은 예정된 수순을 착실하게 밟아갈 따름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선생님의 눈물바람을 뒤로 한 채 교정을 나섰다. 교문 앞 늘어선 후배들이 우리를 전송했다. 내 마음 속에선 "학교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이 일었다.

마을 입구를 지키던 미륵.
 마을 입구를 지키던 미륵.
ⓒ 고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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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난 오랫동안 고향 소식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서 전북 군산으로 이사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76년 광주호가 완공되자, 저수가 시작되어 조상 대대로 부쳐 먹던 전답들이 죄다 물에 잠기면서 마을 사람들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버렸다.

내가 선생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1974년 봄이었다. 두암동 외가에서 멀지 않은 서방시장에서 레코드 가게를 하는 고향 후배에게 놀러갔다가 그 옆에서 옷가게를 하던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한정희라는 아가씨였다.

그때는 어느 땐고 허니, 그 전 해 이에리사가 사라예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바람에 온 나라가 탁구 열기로 가득하던 때였다. 우린 틈나는 대로 탁구를 치러가곤 하면서 차츰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무슨 이야기 끝이었던가. 아가씨가 자기 오빠가 소설가 한승원이라고 했다. 이미 한승원의 소설 몇 개를 읽었던지라, 괜히 반가웠다. 헌데, 더욱 반가운 것은 자기 오빠와 기호민 선생님이 절친하여 자기 집에 가끔 바둑을 두러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또 다시 중등 준교사 자격증을 획득해서 광주 동신 중학교라는 곳에서 국어교사를 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은 바 있었다.

아마도 두 분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날 더러 자기 집에 놀러가 선생님도 한 번 뵙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때쯤엔 벌써 내 인생이 궤도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처지라 선뜻 선생님을 뵐 처지가 아니었다.

광주 언저리에 사는 우리 동창들은 80년대 초반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계 형식으로 모이고 있다. 계를 시작하던 초기에 선생님을 모셨는데, 선생님께선 우리들의 달랑 한 장뿐인 졸업사진을 들고 나오셨더란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 시절의 추억을 말씀하시더란다. 물론 나의 소식도 물어 보시기도 하고….

얼마 전 졸업식을 마친 고등학생 둘이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승용차 트렁크에 앉아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어느 중학생들이 나체로 졸업식 뒤풀이를 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세월은 흘러가고 풍속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풍속이 그처럼 과격해지는 것은 마음이 공허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 울었을까? 우린 속시원하기만 하던데 말야."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옛날을 이해하겠는가 어쩌면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이야기를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로 받아들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학교 생활이라는 게 지금처럼 황폐화돼 있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물질이 크게 기승을 부리지도 않았다. 물질이 기승을 부리면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법이다.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마음은 공허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쉽게도 내겐 그때 찍은 졸업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 십 몇 년 전에 당한 불의의 화재로 인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 마음 속에는 어떤 세월의 풍파에도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흑백사진 한 장이 찍혀 있다.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태그:#충효국민학교 ,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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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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