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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행 가방이 아직도 빈에 있다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여행 가방이 도는 컨베이어 벨트를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내 가족의 여행 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들은 자기 짐을 찾아 하나둘 모두 공항을 떠나갔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혹시 빈에 우리 여행 가방이 있는 게 아닐까? 아내의 얼굴에도 점점 초조한 기색이 돌았다.

나는 컨베이어 벨트 옆의 데스크에 앉아 있는 그 항공사의 승무원을 찾았다. 나는 내 짐이 왜 아직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얼굴이 깡마른 이 여직원은 자기가 체크해 볼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 여자는 빈 공항에 전화를 하더니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직원은 우리를 보더니, 우리 여행 가방이 아직도 빈에 있다고 했다. 뭐라고?

그 여직원이 친절했다면 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자기 잘못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 여자가 너무 얄미웠다. 아내와 딸 앞에서 괜히 면목이 없었다. 나는 흥분했고, 언성을 높였다.

한산한 거리를 달려 드골 공항으로 향하다.
▲ 일요일 아침의 파리 거리 한산한 거리를 달려 드골 공항으로 향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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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정말 그래도 되느냐? 언제 여행 가방을 받을 수 있느냐? 호텔에 몇 시까지 가져다 줄거냐? 너희 때문에 내가 뺏긴 시간과 불편함을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

하지만 여기는 사람들이 쌀쌀 맞기로 유명한 파리였다. 이 여직원은 따질 게 있으면 내가 티켓을 산 대리점에 따지라고 한다.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행가방 분실 신고서를 작성하고, 호텔의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 여직원은 내일 오전 11시까지 내가 묵는 호텔까지 여행가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아내와 딸의 세면도구, 그리고 화장품이 파리에 도착하지 않은 큰 여행 가방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액체류는 비행기 기내에 직접 가지고 타지 못하기 때문에 큰 여행 가방에 넣어서 맡길 수 밖에 없는데, 결국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내 여행가방은 내일 아침에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나 자세가 분명히 내 속을 더 태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 공항에 직접 와서 여행 가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의 택시비는 보상해 주느냐고 물었더니 택시 타고 와서 택시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한다.

안 좋은 일은 겹치는 법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저녁시간, 계획에 없던 택시를 무조건 집어탔다. 파리 시내 북동쪽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30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아름다운 파리 시내의 밤거리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긴 비행기 여행에 질린 아내는 화장품이 담긴 여행 가방마저 나오지 않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파리 시내는 혁명 기념일 전야제로 들썩이고 있었다. 멀리서 개선문이 시야에 들어왔고, 혁명을 기념하는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은 겹치는 모양이다. 맙소사! 개선문 주변의 모든 길은 행사 준비로 인해 통제되고 있었고, 내가 예약한 에펠탑 주변의 호텔로 향하는 대로도 통제되고 있었다. 내 가족이 탄 택시는 개선문 앞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택시기사는 세느강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에펠탑까지 연결 가능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도도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파리 지리를 어느 정도 아는 나는 택시기사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다. 택시 요금 계산기의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택시가 한참만에 겨우 우회하는 길로 들어섰지만 이제는 차량 정체로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계속 말이 없었다.

잃어버린 짐을 찾으러 가다
▲ 드골 공항 가는 길 잃어버린 짐을 찾으러 가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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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택시 요금이 올라가고 있지만 나의 호텔 가는 길은 계속 막혀 있었다. 신영이는 피곤해서 택시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나는 가장으로서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호텔까지 어느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고 보자,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뒤 트렁크에서 작은 여행가방 하나를 내리고 호텔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내 자신이 괜히 처량했다.

부실한 호텔 지도 하나를 들고 길을 찾다가 한 프랑스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다행히 그 청년의 손에는 상세한 파리 지도가 있었다. 그 청년은 일본 아가씨 2명과 혁명 전야의 파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묵을 호텔이 있는 루에 찰스 거리(Rue St.Charles)까지 우리를 친절히 데려다 주었다. 나는 오늘 분명히 헤매고 있지만, 순간 순간 예상치 못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 내 불운의 일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호텔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예약할 때 호텔을 다녀갔던 사람들의 댓글을 유심히 읽어 보았고, 이 호텔 종업원들이 친절하다는 글이 많아서 호감이 가는 호텔이었다. 그 댓글 중에서 방이 작다는 글도 읽었지만, 그 내용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실제 와서 본 호텔은 2인용 침대가 겨우 방에 들어갈 정도로 정말 작은 방이었다. 침대도 작아서 나와 아내, 그리고 딸이 함께 자기도 불가능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 가족 3명이 겨우 몸을 넣을 정도였고, 화장실의 불은 수시로 깜빡거리는 한심한 호텔이었다.

혁명기념일 때문에 원하던 호텔의 예약이 불가능했지만, 파리에 오기 전 나는 에펠탑 옆에 자리 잡은 호텔에 겨우 예약이 되어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호텔에 도착하여 침대 옆 바닥의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에 담요를 깔고 있었다. 내 사랑하는 여인들을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폭발했다.

나는 아내와 신영이의 칫솔과 치약을 사러 혁명 전야의 파리 시내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참 흥미로운 날인데,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호텔에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창 밖의 어둠 속에서 파리의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꼬이는 여정은 다음날도 계속 되고...

다음날 아침, 화장실 형광등을 켰더니 형광등이 켜지지 않았다. 당장 아래층에 내려가서 당직을 서는 직원에게 화장실 형광등을 수리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날이 밝아야 방 수선을 담당하는 직원이 나와서 고칠 수 있다는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암흑 속에서 몸을 씻고 화장실은 호텔 로비 옆의 화장실을 사용했다.

잠이 부족한 아내는 호텔에서 쉬게 하고, 나는 신영이와 함께 샤를 드골 공항으로 향했다. 흑인 택시 기사는 잠시 에펠탑 앞에 택시를 멈춰 섰다. 드골 공항이 워낙 넓기 때문에 내가 타고 온 항공사의 공항 내 위치를 동료 택시기사에게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수많은 외국 항공사 중 한 항공사의 공항 내 위치를 다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경기장에서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 파리 월드컵 경기장 이 경기장에서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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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거운 마음 속에서도 창 밖의 경치들을 계속 사진기에 담았다. 에펠탑이 지나가고 개선문도 야속하게 지나갔다. 창 밖으로 스치는 파리의 축구 경기장도 열심히 사진기에 담았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아주 차분하게 축구 경기장을 설명해 주었다. 저 큰 경기장에서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다고 말하는 택시기사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때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택시 요금계산기의 유로화 요금은 사정없이 올라갔고, 나는 아침 10시 경에 샤를 드골 공항에 다시 도착했다. 친절한 택시기사는 우리와 함께 택시에서 내려서 내가 찾아갈 항공사의 터미널 번호를 한 항공사 여직원에게 물어보고 재차 확인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꼬이는 여정은 공항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터미널에 그 항공사 데스크는 없었다. 한참 떨어진 옆 동에 그 항공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택시 기사는 자신의 택시로 우리를 다시 그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 앞에는 여행길의 악마와 천사가 번갈아 나타나고 있었다.

공항 안에는 대한항공 직항을 이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어찌나 부럽게 보였는지 모른다. 내가 왜 그렇게 뛰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계속 뛰었다. 계속 뛰는데, 신영이가 인포메이션 센터를 알리는 'I'자를 금방 지나쳤다고 한다. 그래? 생각 없이 서두르는 나보다 어린 신영이가 더 나았던 것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공항 내부의 클레임 창구 위치를 확인하고, 복잡한 공항 길을 약간 헤매다 그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곳에는 클레임을 담당하는 직원이 한 명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고,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에게 그 항공사 직원을 클레임 데스크로 불러내라고 했다.

크고 아름다운 공항이지만, 나는 흥분해 있었다.
▲ 파리 드골 공항 크고 아름다운 공항이지만, 나는 흥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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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클레임 창구의 여직원. 친절함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잠시 대충 전화를 해 보더니 우리 여행 가방이 아직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다시 왔는데 하늘이 노랬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빈에서 파리까지 출발한 항공기가 있으니 분명히 그 안에 내 여행 가방을 싣고 왔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여행 가방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말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내가 계속 버티자, 조금 있다가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여직원이 나왔다. 나는 이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그래도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 여직원은 화물창고 직원과 계속 전화 통화를 하였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여러 종류의 여행가방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여행 가방과 비슷한 가방을 지목하라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여행가방 사진 중에서 내 여행가방을 닮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그 여직원은 또 한참동안 통화를 했다.

딸이 반가운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만나고 있다.
▲ 여행 가방이 나오다 딸이 반가운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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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직원은 나에게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몇 분이 흘렀다. 여행 가방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저 밑에서 무언가 덜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밑에서 내 여행 가방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흥분과 걱정이 컸던 만큼 여행 가방을 다시 보는 반가움도 컸다.

다시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를 갈랐다. 이 택시 요금은 항공사에 청구해서 기필코 돌려받을 것이라고 결심하면서. 일요일 파리에서의 황금 같은 오전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서면서, 신영이가 엄마에게 기쁘게 말했다. 딸은 그 무거운 가방을 밀며 호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여행가방 찾아왔어"

그 안의 세면도구로 말끔히 씻고 화장도 한 아내는 조금씩 기분이 풀려갔다. 방도 넓은 3인실로 옮겼다. 나의 해외여행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날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프랑스, #파리, #샤를드골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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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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