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08년 2월 26일. 나는 일생에 마지막인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서 종로1가 교보빌딩 바로 뒤에 있는 2층 헌혈의 집을 찾았다. 내일이면 내 나이가 만 64세가 되어서 더 이상 헌혈대에 누울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혈액보유량이 늘 위험 수위를 맴돌고 있지만, 헌혈자의 건강을 염려하여 연령 제한을 둔 것이란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이 없는 나의 경우 40대 체력이란 판정을 받았는데도, 연령상 헌혈이 안 된다니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혈액원 밖 길거리에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헌혈을 권장하며 안내하는 분이 서 있었지만 나를 보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헌혈의 집 문을 밀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듯 했다.
나는 접수실에서 항상 하던 대로 인적사항을 적어서 제출하고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실내에 있는 젊은이들을 둘러보면서 아직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이렇게 건실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제 오늘로 더 이상 헌혈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아직도 창창한 나이에 가끔은 이렇게 헌혈을 해서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미 내 앞에 들어와서 헌혈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5명이나 있었고, 내가 접수를 한 뒤에도 계속 들어와서 어느새 헌혈의 집에는 앉아 있을 자리가 없을 만큼 가득 차가고 있었다.
나는 1985년 1월 12일에 처음으로 헌혈을 하기 위해서 마포에 있던 적십자중앙혈액원까지 직접 찾아갔다. 난생 처음으로 헌혈을 하면서 내 팔에서 빠져 나간 저 피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나도 그런 좋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마음에 기쁨이 넘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멀리 민통선 철책 아래에 있는 파주군 파평면 장파리에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헌혈을 하는데 조금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다. 말라리아 위험지역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장거리 출퇴근 때문이었는지 나는 만 1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두 번째 헌혈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매년 한 두 번씩 헌혈을 하였지만, 1991년 교감으로 승진을 하면서부터 교장으로 승진을 하기까지 약 8년 동안은 전혀 헌혈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교감 생활을 하는 동안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경기 북부지역인 양주, 파주, 고양 등으로 늘 멀리 출퇴근을 하여야 했기에 헌혈하러 일부러 나오기가 힘들었다.
이 기간에 매년 한 번씩만 했더라도 내가 스스로 약속을 했던 30회는 채울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하지 못해 30번을 채우지 못하고 오늘 겨우 26회를 마지막으로 헌혈을 마감해야 하게 되었다. 적십자 혈액원의 규정상 만 64세가 넘으면 더 이상 헌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헌혈을 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하여서 라고는 하지만 요즘은 나이 들어도 건강상의 문제 그리 많지 않거나 오히려 젊은이 못지않은 탄탄한 육체와 체력을 지닌 분들이 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 규정도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적십자에서 이 규정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평균수명이 75세를 넘기고 있다. 그래서 만 64세는 아직 경로당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젊은이 취급을 한다. 어디 가서라도 환갑을 넘긴 걸로는 노인 대접을 받지도 못한다. 환갑내기라는 말은 아직도 청춘이라는 말로 인식이 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고령화가 진행이 되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이제 적십자의 헌혈 규정을 고쳐서 혈압이나 혈소판, 적혈구의 수량이나 다른 건강상의 문제만 없다면 몇 년 더 헌혈을 할 수 있게 해주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혈액 보유량이 늘 불안할 정도로 줄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젊은이들이 학교 공부에 시달리고, 취직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나라도 없다고 생각하면, 젊은이 중 누가 쉽게 헌혈대에 누우려고 하겠는가 싶어진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지니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본인이 희망 할 경우 헌혈을 꼭 막아야할 이유는 없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내가 약속한 30회를 채우지 못하고 마지막 헌혈을 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제는 헌혈도 안 받아주는 고물단지가 되었구나 싶으니 어찌 서글프지 아니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조인스건강블로그, 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