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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엔 비가 내리더니 한낮인데도 골짜기 가득 눈이 내린다. 서설인가. 누구를 축하하기 위한 눈발이던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명박을 축하하기 위한 눈인가. 무사히 퇴임하는 노무현을 축하하기 위한 눈발인가. 적어도 나는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눈발이 노무현을 위한 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는 충분히 축하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6.29 항쟁의 결정판'

 

지난 5년 동안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참여정부가 이틀 후면 막을 내린다.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대통령 노무현. 그의 고향인 봉하마을엔 5년 전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와 같이 노란 풍선이 달리고, 거리엔 노란 물결이 넘쳐난다.

 

노무현을 상징하는 노란색의 물결. 그 노란색은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철학을 좋아하는 국민들이 만들어냈다. 더불어 노무현은 자본과 거대 언론과 재벌들이 만든 대통령이 아니라 이름없는 국민들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대통령이다.

 

그러하니 적어도 그를 상징하는 노란 풍선은 척박한 대지를 떠나 하늘로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외된 국민들의 희망이었고, 노란색은 권위와 오만과 가진 자들의 색이 아닌 잡초처럼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들의 눈물 겨운 색인 것이다.

 

노란색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5년 전의 일이다. 어떤 이는 그 일을 두고 1987년 6.29 항쟁의 결정판이라고 했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군부독재는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졌고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군부독재의 그늘은 질기게도 따라다녔다.

 

노란색의 신화는 국민들이 만들어낸 혁명과도 같았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국민들은 수 십 년에 걸친 투쟁을 했다. 더러는 목숨을 버렸고, 감옥에도 갔으며, 스스로 투사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렇게 쟁취한 피눈물 나는 혁명의 결정판이 노란색의 신화인 참여정부였다.

 

기득권의 역사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바라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았다. 국민들의 바람과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무현은 자본과 거대 언론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싸움은 힘겨웠다. 1백년 가까이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의 반격도 대단했다. 그들은 세상이 좌파 세상이 되었노라 붉은 페인트를 덧씌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위기 의식을 느낀 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노무현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그들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노무현은 혁명 동지들인 국민들의 힘을 믿었을까. 그때만 해도 노무현은 당당했고 거침이 없었다. 경박한 대통령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개혁의 피로감'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개혁은 그 본질과 이루고자 하는 근본이 다를지언데 그들은 '힘 들어 못 살겠다'며 피로감을 호소했다. 그들의 엄살 작전은 성공했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마저 그들의 전략에 말려 들었고,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고 노무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노무현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를 선택했지만 철학적 소통은 거부했다. 알아서 잘 해주는 대통령을 바랬지, 사사건건 시비 붙고 토론하자는 대통령은 싫었던 것이다. 문화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탓이다.

 

대한민국은 또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철학적 담론을 생산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노무현은 그즈음부터 토론을 포기했다.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입을 닫았다. 입을 닫았으면 말이나 말지. 돌아선 자리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언행들을 쏟아냈다. 지식의 부재는 노무현을 힘들게 했으며, 결국 사회를 병들게 했다.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 노무현의 토론 정치 거부해

 

철학의 부재는 곧 정신적 빈곤으로 이어졌다. 군부독재로 이어진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잃었던 것이 건강한 토론 문화라면, 대한민국은 모처럼 맞은 호기를 스스로 포기한 채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며 그 길로 돌아가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요즘의 상황을 보면 그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품어야 할 시기에 우리는 다시 알 속에 갇히기를 선택했다.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되었건만 우리는 늘 허기진다고 징징거렸으며 불확실한 미래 경제를 누군가 책임져 주길 기대했고, 결국 그 적임자로 이명박을 선택했다.

 

이명박 정부는 하루 다섯끼를 먹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개발독재로 가던 말던 배만 부르게 해주면 환경파괴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단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불행히도 하루 세끼를 먹기에도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질적 풍요만이 삶의 기준점이라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신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세월'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명박은 '과거의 일에 있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칼을 벼르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칼날이다. 서슬퍼런 칼 앞에서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있다.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런 일을 접하면 괜히 슬퍼진다. 노무현 정부와 함께 했던 이들의 행동이라 더욱 서글퍼진다. 모든 매는 노무현이 맞고 가라, 이런 식이다. 좋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렇게라도 살아남아라. 그 일을 할 능력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금배지 집어 던지고 조용히 낙향해라. 그것이 노란색의 신화를 만들어낸 국민들에 대한 도리이자 예의이다.

 

노무현의 철학과 이명박의 경제 마인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명박의 철학이다. 당선인과 인수위의 활동을 보면 과연 이명박에게 철학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문만 남기면 된다는 경제 마인드와 인문학적인 철학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노무현은 자연인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그의 철학을 담아내지 못했던 국민들은 그를 눈물로 보내야 한다. 국민을 대신해 숱한 매를 맞았던 그를 따듯하게 맞아야 한다.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마음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는 대통령이기 앞서 투사였으며, 5년 동안 투사의 길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국민들이 인정해야 한다.

 

아쉬움 많은 5년 세월, 노무현만큼 민주주의 성숙시킨 대통령도 없어

 

지난 5년 세월, 아쉬움도 많았다. 국가보안법을 폐기시키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다. 이라크 파병으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자주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한미 FTA 협정 체결은 국민들로부터 많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는 동안 나는 노무현을 안주 삼아 술도 마셨고, 그를 향해 욕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젠 노무현에 대한 섭섭함을 잊어야 한다. 대통령도 할 수 없었던 일까지 요구했던 우리의 충정어린 마음 또한 접어야 한다.

 

아쉬움이 컸지만 인간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당당했으며, 나름의 임무를 완수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사람치고 노무현만큼 당당한 투사를 우리는 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이 투사가 되어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이 나라에서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그나마 노무현이 뿌려놓은 씨앗이 발아도 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것이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노무현이 뿌린 씨가 싹이 트고 곧게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켜보는 일이다. 눈 크게 뜨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끊지 않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국민으로 살아가는 자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대통령 노무현에서 인간 노무현으로 회귀하는 노무현에겐 다행히도 많은 지지자들이 남아있다. 그의 철학과 정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사심없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사람도 있고, 일관된 그의 정신에 반한 사람도 있다. 많은 대통령을 배출한 대한민국에서 노무현만큼 욕 많이 먹고 흠씬 두들겨 맞은 대통령도 없다.

 

그럼에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진정성에 가치를 둔 당당함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그의 철학이 만들어낸 당당함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그를 어떻게 기록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는 이 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대통령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인간 노무현에 대한 지나친 감상일까, 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들기엔 내 나이가 적지 않다. 지난 며칠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민주주의를 이 만큼 성숙시킨 대통령은 인간 노무현 당신밖엔 없다.

 

형 아우할 연배는 아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 나누며 밤 새워 토론 하고픈 사람 중에 첫번째로 당신을 꼽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국민이 꿈꾸었던 노란색의 신화를 접는다.  


태그:#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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