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심양 고궁에 있는 대정전은 청나라 건국 당시 궁궐 정전이다. 높이 20m의 아담한 건축물이며 몽고 전통가옥 게르를 연상하게 한다. 정전 좌우로 십왕정(十王亭)이 도열하듯 자리 잡고 있다.
▲ 대정전. 심양 고궁에 있는 대정전은 청나라 건국 당시 궁궐 정전이다. 높이 20m의 아담한 건축물이며 몽고 전통가옥 게르를 연상하게 한다. 정전 좌우로 십왕정(十王亭)이 도열하듯 자리 잡고 있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조직

남색, 백색, 황색, 적색의 4기군 깃발
▲ 4기군 깃발. 남색, 백색, 황색, 적색의 4기군 깃발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송화강과 목단강 유역에 살고 있던 건주여진족은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고 조선이 4군을 설치하자 동가강 유역으로 옮겨갔다. 여진족의 수장에 불과했던 누르하치는 훈허강(渾河) 유역에 자리를 잡고 군사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150여 가구가 화살(矢)이라 부르는 중대로 조직되었고 50개의 중대가 다섯 개의 연대 즉, 7500 가구 규모의 한 개의 기(旗)를 이루었다.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조직은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조직이었다. 공포의 8기군의 전신 4기군이다.

누르하치는 항복하거나 정복한 부족들을 시기(矢旗) 군사계급으로 흡수 편입시켜 황(黃), 적(赤), 백(白), 남(藍) 기를 내리고 아들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다. 이들이 훗날 청태종으로 등극한 8자 홍타이지, 2자 예친왕(禮親王) 다이산, 12자 영친왕 아지거, 14자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현(縣)과 향(鄕)으로 편성되어 있으나 내몽고 자치구는 아직도 현을 깃발이라고 부르고 향을 화살이라고 부른다.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 임진왜란

청나라를 건국한 청 태조.(심양 고궁에서 촬영)
▲ 누르하치. 청나라를 건국한 청 태조.(심양 고궁에서 촬영)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남의 불행은 나의 행운이라 했던가?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조선 강토는 왜군에 짓밟혀 신음했고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휘청거렸다. 이것은 누르하치에게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누르하치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세력을 키워갔다.

칼날을 숨기고 명나라에 공손한 태도를 취한 누르하치는 도독첨사라는 관리로 임명되었다. 명나라 조정에 충성하던 아버지가 명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복수심에 불타던 누르하치는 절치부심 칼을 갈았다. 기회를 엿보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을 통합하여 4기군을 8기군으로 재편성하여 만주족이라 이름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616년, 후금 칸의 지위에 오른 누르하치는 1619년 무순과 요동을 점령하고 심양으로 천도했다. 명나라에 정면대결을 선언한 것이다. 동조세력이 필요한 누르하치는 다른 종족에 비해 몽고족에 우호적이었다. 명나라 정복에 몽고족을 종속적인 동업자로 참여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몽고 귀족 출신으로 홍타이지 장비가 된 여인. 황제가 승하하면 후궁을 순장시키는 여진족 풍습에 따라 죽음의 위기에 몰렸으나 첫사랑 도르곤의 구원으로 살아났다. 남자보다도 아들 복림(순치제)를 택한 철혈여인이다.(심양 고궁에서 촬영)
▲ 효장황후. 몽고 귀족 출신으로 홍타이지 장비가 된 여인. 황제가 승하하면 후궁을 순장시키는 여진족 풍습에 따라 죽음의 위기에 몰렸으나 첫사랑 도르곤의 구원으로 살아났다. 남자보다도 아들 복림(순치제)를 택한 철혈여인이다.(심양 고궁에서 촬영)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만주족은 몽고 귀족 가문과 적극적인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두 종족 간의 동맹관계를 한층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1612-15년 기간 중,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정복 정책을 계승한 홍타이지는 12명의 딸들을 몽골 부족장들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동맹을 한층 더 강화했다. 여진족이 몽고 동맹군과의 동류의식이 강했던 것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대체로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누르하치의 성(性) 애신각라(愛新覺羅아이신줴뤄)다.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반론을 제기하는 또 다른 가설은 애신은 김나라의 김(金)을 뜻하는 말이며 김씨(金氏)는 황금(金)을 좋아하던 훈족이 사용하던 성씨였다는 것이다. 훈족의 후손인 모용씨가 한반도로 넘어와 석씨집단을 몰아내고 김씨 왕조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여진족이 우리 민족의 한 갈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청 태종.(심양 고궁에서 촬영)
▲ 홍타이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청 태종.(심양 고궁에서 촬영)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고려에 패망한 신라 왕족의 후예들이 만주로 이동하여 터를 잡아 후김(金)나라를 세웠고 그 후손이 누르하치라는 설이다. 여진족(女眞族)이라는 명칭 또한 중국이 우리를 동이족이라 부르듯이 고구려의 려(麗)자와 발해 최초의 이름 진(振)을 폄하해 부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진은 두음법칙으로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주신(朱先, 諸申, 珠申)이라고 만족대사전(滿族大辭典)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열거한다. 따라서 여진족은 천산주신족이며 중국이 동이족을 주신(珠申)족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한민족의 한 갈래이며 백두산을 염두에 둔 천산주신족도 예사로운 명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설일 뿐 아직 검증된 바 없다.

누르하치에 이어 황제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목표를 명나라로 설정했다. 요하를 건너 서진하려면 북방에 있는 몽고와 바닷길로 맞닿아 있는 조선이 걸림돌이 되었다. 몽고는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조선에게는 육전에 익숙한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수군(水軍)이 있었다. 더욱이 조선 수군은 불과 40년 전 한반도를 유린한 일본군을 바다에서 격퇴한 경험이 있으며 전설적인 장수 이순신을 배출한 수군이 아닌가.

"군신관계를 거절한 조선을 정벌하라"

홍타이지는 1635년에 몽골 찰합이부(察哈爾部)를 정복하고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손아귀에 넣었다. 항복한 몽고 부족장들이 심양에 모여 홍타이지에게 몽고가한(蒙古可汗)의 칭호를 올렸다. 대 제국 원나라의 정통성을 획득한 것이다. 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개칭한 홍타이지는 몽고족과 요동 한족(漢族)을 각각 별도의 8기군으로 편성했다.

명나라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청나라는 심양을 방문한 사신 박노에게 제고지문(制告之文)이라는 옥새를 종이에 찍어 보내며 정묘호란으로 맺어진 '형제맹약'을 파기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어 한반도에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다. 조선이 이에 불응하자 11월 25일까지 왕자를 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홍타이지의 요구를 조선은 외면했다.

12월 1일. 다이산, 아지거, 도르곤, 도도 등 형제 4기군왕과 경중명 공유덕 등 이민족 출신 왕과 장수들을 심양에 소집한 홍타이지는 아우 도르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여진족 7만, 몽고족 3만, 한족 2만 도합 12만 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정벌하라 명령했다.

12월 5일. 압록강변 구련성에 도착한 도르곤은 전열을 정비하며 이틀 동안 냄새를 피웠다. 군사동원을 눈치 챈 조선이 알아서 복종하기를 기대했다. 이 때 청군 지휘부에서는 조선인 세작을 풀어 조선군의 군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허나, 조선의 응답은 없었다. 대적할 군사도 없는 조선이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무적의 팔기군 기병대를 앞세운 청나라는 압록강을 건넜다.

이 무렵, '구련성의 청군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수비대의 봉화가 2자루 올랐다. 그러나 도원수 김자점이 "소식이 도성에 알려지면 민심이 놀란다"며 정방산성에서 차단했다. 압록강을 건넌 도르곤은 선봉장 타닥에게 몽고족 출신 군병 3만을 주어 한성을 향하여 진군하라 명했다.

중국 단둥에서 압록강 건너 손에 잡힐듯이 보이는  의주 백마산성.
▲ 백마산성. 중국 단둥에서 압록강 건너 손에 잡힐듯이 보이는 의주 백마산성.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허둥지둥 피난길 나선 임금, 그러나 강화도길은 막히고…

의주부윤 임경업은 수적인 열세를 통감했다. 임경업 장군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본진이 지나간 다음 꼬리를 자르고 배후를 협공하거나 심양을 역습하기 위한 전술적 복안이었다. 그러나 도찰사에게 요청한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전술을 예견한 홍타이지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심양에 있었다.

선봉장 타닥은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린 임경업군을 후속부대에 넘기고 남하했다. 청나라 선봉대가 신천과 안주를 지나는 동안 조선군의 저항은 없었다. 평양을 무혈입성한 청나라 군사가 송도를 지났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대궐에 날아들었다. 이 때 이미 청군은 양철평을 지나고 있었다. 녹번 고개 넘어 양철평은 도성과 지척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인조는 예방(禮房) 승지 한흥일에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강화도로 떠나라 명하는 한편,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하여 빈궁 행차를 배행하게 했다. 청나라 장수 타닥은 정묘호란 때 왕을 놓쳐버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선수를 쳤다. 양화진이 봉쇄되고 김포가 적 수중에 떨어졌다.

임금이 허둥지둥 대궐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혔다. 인조는 숭례문 누각에 올라 탄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현세자의 가슴은 미어졌다. 발길을 돌린 인조는 도성으로 다시 들어가 수군문을 빠져 나갔다.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넌 지 7일 만이다. 얼어붙은 삼전도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에게는 군사 1만 3천명과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태그:#누르하치, #홍타이지, #효장황후, #도르곤, #구련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