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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사는 마을로 가는 길. 비포장 도로를 30리 이상 올라 가야한다.
▲ 단임골. 신선이 사는 마을로 가는 길. 비포장 도로를 30리 이상 올라 가야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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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광. 성씨가 말해주듯 그는 북쪽 사람이었다. 아직도 이씨 성보다 '리'씨를 사용하는 그는 함경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22살 때 남쪽으로 넘어온 그는 당시 북한군 병사였다. 그는 귀순 당시 세계일주가 꿈이라고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가 1967년이니 남쪽 사람들도 세계일주를 꿈꾸지 못한 시절,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으로 왔다.

- 꿈은 이루었나요?
"어렵더군요. 지금까지 남쪽을 떠나본 게 2년 전 금강산에 가본 게 전붑니다."

세계일주는 자유의 나라라고 하는 남쪽에서도 쉽지 않았다. 여행 자유화가 되었다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넘어온 지도 벌써 40여 년. 북쪽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떠나온 세월이 더 긴 그의 삶. 그러나 그는 아직도 태어난 고향의 언어와 억양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영원한 자유인 '리영광씨', 그의 자유를 함께 꿈꾸는 "박안자씨'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리영광(64)씨. 그는 가슴에 품고 있는 꿈 하나를 잊지 못해 아직도 신열을 앓듯 신음한다.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자유인의 삶. 남쪽에서 그는 30년 세월을 홀로 지냈다. 기다려야할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찾아야할 사랑이 있는 삶도 아닌 리영광씨의 고독한 여정은 바람 같은 것이었다.

외로움과 싸워 이길 수 없으면 자유인이라 할 수 없던 시절. 그는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작은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산촌으로, 오지로 숨어들었다. 세상과 부대끼는 일이 고독이나 외로움보다 힘들었던 그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애써 몸을 감추지만 그의 삶은 자주 세상에 들통이 났으며, 그의 삶을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의 발걸음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단임골. 그가 둥지를 틀고 있는 단임골은 국도를 버리고도 비포장도로를 30리 넘게 올라야 닿을 수 있는 마을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살아왔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도 알고보면 자연의 일부. 방문객이나 리영광씨나 두 발로 걷는 자연일 뿐이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던 그를 따듯하게 품은 이가 있었다. 그의 부인인 박안자(59)씨다. 그녀는 10년 전 리영광씨가 사는 단임골로 새처럼 날아들었다. 벌써 10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삶은 아직도 깨소금 밭을 거닐고 있다.

쉰을 넘긴 총각과 이혼녀의 만남 "사랑요? 일상입니다"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받고 자살까지 결심했던 그녀는 리영광씨와 10년 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얼굴을 마주한 지 며칠 만에 결정한 일이었다. 쉰을 넘긴 총각과 이혼녀와의 만남. 서로 적지 않은 나이에 새출발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단임골을 찾았다.

리영광씨 부부가 사는 곳인 단임골. 강원도 정선군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다. 2년 전 입은 수해 후에 계곡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세월교였던 다리는 리영광씨 부인의 말처럼 콰이강의 다리처럼 계곡과 어울리지 않게 우뚝 솟아 있었다.

올 겨울 많은 눈이 내린 탓에 리영광씨의 집 마당엔 아직도 눈이 가득했다. 우수를 하루 앞둔 날이었지만 그의 집 주변은 한겨울 풍경이다. 읍내 나들이를 좀체 하지 않는 리영광씨 부부이기에 방문객의 손엔 자반고등어 한 손과 옥수수 박상(튀박)이 들려 있었다.

나는 꼭 1년 전쯤에 단임골을 찾았고, 다음에 오게 되면 내가 펴낸 소설책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내 직업을 소설가라고 했더니 부인은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러마 했는데 그 약속을 1년만에 지킨 것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리영광씨의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1년 만에 만나는 처지. 그럼에도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리영광씨 부인은 지난 겨울에 찾아왔던 길손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자반고등어와 박상을 건네며 책이 든 봉투를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그녀는 봉투를 열어보더니 "어머, 진짜 소설가였네요?" 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럼요, 점 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했다.

리영광씨 집 마당에 있는 돌탑. 통일을 염원하는 탑이다.
▲ 돌탑. 리영광씨 집 마당에 있는 돌탑. 통일을 염원하는 탑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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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이 나른하게 리영광씨 집 마루로 쏟아지고 있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안주인과 마루에 앉아 지난 1년의 시간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방문객이 반가웠는지 자주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면 새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촉을 밀어올리는 듯 조용하기도 했다. 바깥 주인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리영광씨는 오전답에 나무를 하고 와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천변 공사로 인해 장이 꼬인 리영광씨 결국 맹장 수술까지 받아

지붕에 남아있던 눈이 녹으며 낙수를 만들어 내는 시간. 리영광씨 부인과 나란히 앉아 산에서 만들어 낸 향을 맡으며 자반고등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잖아도 아침 식사를 하며 저녁엔 생선이라도 구웠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는데 고등어가 생겼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부산이 고향인 그녀에게 바다가 그립지 않으냐고 물었다.

"갯내음보다 산내음이 더 좋아요. 바다는 하나의 향을 간직하고 있지만 산은 그 향이 시간에 따라 변해요. 아침은 상큼하고 점심 때는 발랄하고 저녁은 그윽하지요."

산골 생활 10년만에 도인이 다 됐다. 그녀보다 더 오랜 세월을 단임골에서 살았던 리영광씨는 어떠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영광씨가 마루가 소란스러웠던지 잠을 털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인사를 나누며 그의 몸을 살폈는데 1년 전보다 수척해 있었다.

- 어? 몸이 많이 야위셨네요?
"얼마 전에 맹장 수술을 했는데 그 여파가 아직까지 가네요."

홀쭉해진 리영광씨의 얼굴엔 작은 수심까지 보였다. 맹장 수술을 하게 된 이유를 차마 묻지 못했는데 그 이유란 것이 눈물겹다. 지난 해 봄부터 수해로 씻겨나간 골짜기를 복구하기 위해 공사가 진행됐는데 리영광씨 집 앞의 개울까지 손댔다는 것이다.

공사 관계자들은 천변에 있던 오래된 버드나무까지 굴삭기로 밀어버리고 제방을 쌓았는데, 그 일을 지켜보던 리영광씨는 속이 무척이나 상했다고 한다. 아무렇게나 난 풀 한 포기조차 소중하게 여기는 리영광씨로서는 아름다운 천변을 한강변처럼 만드는 것에 항의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아름답던 골짜기가 흉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영광씨.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자 장이 조금씩 꼬여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봄부터 시작한 공사는 가을이 지나서야 끝이났고, 결국 장이 탈이 나더니 지난 해 연말엔 맹장 수술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그와 공사 현장을 가보았더니 인간이 남긴 흔적치고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으며 흉하기까지 했다. 버드나무가 낭창거리던 천변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물길을 인위적으로 돌린 데다 제방까지 높게 쌓았다. 지금의 모습이 자연의 모습으로 돌려지기까지는 또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할텐데, 인간들은 아무 생각없이 파괴만 일삼았다.

리영광씨는 그 모습을 보면 지금도 장이 꼬인다며 애써 외면했다. 아름답던 단임골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 고생을 했던 리영광씨. 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단임골의 고운 바람과 부인 박안자씨 뿐이었다.

사랑전도사 역할을 하는 리영광씨 부부 '사랑은 기다림부터'

리영광씨의 부인 박안자씨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연을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자연예찬론자이다. 하루종일 산만 바라보고 있어도 삶이 즐겁다는 그녀는 남편인 리영광씨를 자연보다 사랑한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사랑의 감정이 뚝뚝 흘러내린다. 리영광씨 부부를 만나면 당장 갈라설 부부도 마음을 바꿀 정도다.

"가끔 연인들이 찾아와요. 티격태격하던 연인들도 이곳을 다녀가면 사이가 좋아진대요. 어떤 남녀는 싸움만 하면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요."

- 사랑전도사 역할도 하시네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하는 것이지요. 이런 곳에 있으면 싸울 일 하나도 없거든요.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섭섭했던 마음 같은 것도 싹 가셔요."

아직도 길을 걸을 때면 손을 꼭 잡는다는 리영광씨 부부. 박안자씨는 아직도 사랑할 일이 많다며, 그런 감정을 숨길 이유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사랑의 감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것이니 굳이 막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밀려오는 감정에 충실할 때 사랑은 지켜지거나 다가오는 것이란다.

방구들을 뎁히는 나무. 긴 겨울을 나려면 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 땔나무. 방구들을 뎁히는 나무. 긴 겨울을 나려면 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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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앞둔 그녀이지만 말할 때는 아직도 20대처럼 달떠있다. 박안자씨와 얘기를 나누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이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을 한없이 깊은 사랑으로 대한다.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닌 주기만 하는 사랑이다. 그쯤되니 조금은 무뚝뚝한 리영광씨로도 견딜 재간이 없다. 받은 사랑이 되돌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이어지고 피어난다.

"사랑은 받으려고 하면 힘들어서 못해요.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이 즐거워져야 하거든요. 스스로 즐겁지 못하면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도 없고요. 난 사랑을 이렇게 주었는데, 넌 뭐냐. 이런식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해요. 그건 가계부 사랑이거든요."

- 가계부 사랑이요?
"예, 지출서를 쓰는 사랑이죠. 준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랑 말이에요. 그럼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거든요. 안 주니 만큼도 못한 사랑이지요."

- 사랑이라는 거 참으로 풀기 힘든 명제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방을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걸 자주 잊어요. 나무를 해야 하고,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하고, 나무를 말리고, 그런 다음 아궁이에 넣어 방구들을 뎁히거든요. 나무를 넣은 후에 곧 바로 방이 뜨거워지지 않거든요. 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이 필요하듯 사랑도 그래요. 기다림부터 배우지 못하면 사랑은 일회성 그릇에 불과하거든요."

인생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박안자씨. 자살까지 결심했던 지난 날의 아픈 기억은 오래 전에 잊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정신 만큼은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의 감정으로 행해지는 것들 모두가 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돈은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환경 파괴하는 대운하? 반드시 막아야 해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돈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경제적 풍요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산다. 결과적으로 돈이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셈인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다. 정신적 파탄의 원인을 스스로 만든다. 그러나 리영광씨 부부는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두고 산다. 리영광씨 부부의 삶이 부러운 이유다.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대화 끝자락엔 한반도 대운하 이야기도 나왔다. TV조차 없이 살고 있는 리영광씨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단임골의 천변이 굴삭기 하나로 파괴되었듯 환경을 파괴하는 대운하 또한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게 리영광씨의 생각이다.

"대운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의 생각이죠. 나라가 온통 도로 천지인데 물길을 또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는 발상인가요?"

- 그 일로 반대의 목소리가 큽니다. 지성인들과 종교인들의 참여가 높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잘못 되면 나라가 망해요. 무엇보다 공사를 하려면 엄청나게 기름을 써야 하는데 미국놈들 기름 사주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미국이라면 고개를 흔드는 리영광씨는 미국 돈 벌어 주는 일은 극도로 경계한다. 그러함에 그는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도 없다. 그들 부부는 읍내에 볼 일이 있으면 먼 거리를 걷는다. 그런 이유로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두 사람의 읍내 나들이는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리영광씨 집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제법 많다. 방학 때면 전국에 있는 교사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삶과 사랑이야기를 만나기 위한 걸음들이다. 지난 연말엔 박안자씨가 백여 통의 편지를 지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답장으로 온 것이 스무통. 편지 쓰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생활을 감안한다면 답장의 수가 많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박안자씨가 녹았던 길이 얼어 붙을지도 모르니 어서 골짜기를 내려가라고 했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 정도는 알고 있기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단임골을 떠났다.

그들 부부와 헤어지면서 다음에 올 때는 읽을 만한 책을 더 많이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박안자씨가 "또 1년 만에요?" 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이번에는 1년만이 아닌 봄이 오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했다.

리영광씨 집. 저녁밥을 짓는다.
▲ 굴뚝의 연기. 리영광씨 집. 저녁밥을 짓는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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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리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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