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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남은 나물에 밥과 고추장을 비벼 푼푼하게 차려 먹고 있으면, 그 집 장남은 소주와 과일, 전 몇 조각을 도시락 가방에 챙겨 넣고 산소 갈 채비를 한다.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부르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명절 오후의 풍경이다.

 

그런데, 명절날 풍경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좀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성묘길을 나서서 조상님 산소 근처에 다다르면, 길 한 모퉁이에서는 색색깔의 꽃을 파는 노점상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명절 연휴 2, 3일을 대목으로 산소 가는 사람들에게 꽃을 파는 일명 '조화할머니'들이다.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풍경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도 명절날 찾아 올 자식이 있고, 토끼 같은 손자들도 있을 법한데, 어찌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저 고생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10년째 한 곳에서 장사해온 최두지 할머니

 

음력 1월 1일 낮 12시. 설날의 화창한 오후다. 우리 가족은 오늘도 어김없이 산소 가는 길에 '조화 할머니'와 마주쳤다. 장소는 경남 고성군 상리면 자은리에 위치한 이화공원묘지 앞이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차를 한쪽 모퉁이에 세우고 카메라를 들었다. '차례는 지내고 왔는지', '그들의 설날은 어떠한지'를 들어보기 위해 나는 조금 집요해지기로 했다.

 

추운 날 조화를 파시는 한 할머니는 길거리에 펼쳐 놓은 꽃들을 등지고 외롭게 앉아 계셨다. 호객을 위한 행동이나 말은 딱히 필요없었다. 간혹 차들을 향해 조화를 든 손을 가볍게 흔드는 정도가 전부였다.

 

올해로 85세인 최두지 할머니는 이 곳 이화공원묘지에서 무려 10년이나 조화 장사를 해오셨다고 한다. 햇빛에 오랫동안 나와 계셔서 최 할머니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늘 미소를 머금으시는 푸근한 인상을 갖고 계셨다.

 

"이화공원묘지가 생긴 지는 13년 됐고, 나는 10년째 여기서 장사하고 있지. 근데 시골마을은 좀처럼 변하질 않아. 허허. 그나저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차례도 못 지내고 나왔구만, 작년보다 영 장사는 안돼. 아무래도 경제가 안좋은가 봐."

 

 

꽃 팔아 번 돈, 독거노인들 위해 쓰여...

 

최 할머니가 이곳에서 사흘간 장사해서 번 돈은 총 300만원. 사흘간 장사 한 것 치고는 왠만한 고깃집보다 벌이가 났다고 생각했다. 근데 알고 봤더니, 여기서 번 돈을 모두 최 할머니가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반 시골마을의 구판장이나 연쇄점에서 하는 그런 장사와는 틀렸다.

 

“허허, 전부 내 돈이 아니고, 동네 돈이야. 부녀회에서 나와서 하는 거지. 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나와 여기저기서 펼쳐놓고 꽃을 팔고, 그래서  번 돈을 모아 부녀회에서 ‘봄놀이’도 가고 독거노인들도 돕고 불우이웃돕기도 10만원씩 해. 그런 곳에 쓰는 거지, 결국 우리가 번 돈 우리가 쓰는 거야 허허.”

 

의외였다. 처음에는 명절 대목날 한몫 챙기러 나온 사람들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돈은 외롭게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에는 사람이 살 만한 집은 몇 채 보이지 않고 논, 밭이 전부였다. 총 몇 가구가 사냐고 물었더니 “서른 가구 사는데 전부 독거노인이고, 남자는 달랑 5명이여”라며 "허허" 웃으셨다.

 

 
최 할머니도 독거노인이었다. 어찌하여 이 시골마을에는 독거노인만 그토록 많은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과 오붓하게 설날을 보내지 왜 이렇게 추운 날 밖에 나와 고생하세요?" 

 

그러자, 최 할머니는 갑자기 흐뭇한 미소를 보이시며 되레 자식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자식들이 4남 1녀인데, 다들 얼마나 잘 컸다고. 그 중에 둘째 아들은 국방대학교 교수야. 똑똑하지? 애들이 돈 못 벌어서 내가 나온 게 아니고 바빠서 그런 거야. 내가 우리 집 호주니 호주 노릇을 해야지 허허.”

“그래도 그렇지, 오늘 같은 날 왜 장사를 하고 그러세요.”

“10년째 해오던 일을 어떻게 그만둬, 내가 늙긴 했어도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좋은 세상 보고 그러는 게지.”

 

늙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

 

설날인 오늘은 유달리 다른 날보다 날씨가 추웠다. 최 할머니는 목도리도 하고 옷도 두껍게 입고 계셨지만  돈 세는 것이 서툴러진다는 이유로 장갑은 끼지 않으셨다. 걱정돼 만져보니, 할머니의 손은 이미 많이 차가워져 있었다.

 

최 할머니는 "어제보다는 추워도 설날인 오늘이 장사는 더 낫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설날'이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도 있다.

 

"추석 때도 장사하고 현충일도 장사하지만, 그 중에 설날이 추워서 제일 힘들어."

 

최 할머니는 평소에는 주로 혼자서 밭을 일구시고 시간이 남으면 경로당을 찾아 동네 비슷한 어르신 분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그래도 장사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더 나아, 나와서 여러 사람 구경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이야기도 오손도손 나누고, 집에서 놀면 뭘해 사람이 일을 해야지 허허.”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박스를 가득 실은 봉고차가 한 대 왔다. 할머니가 펼쳐놓은 조화 들 중 부족한 꽃을 채우기 위해 부녀회에서 지원차 온 것이다. 봉고차를 몰던 사람도 노인분이셨는데 그 중 최두지 할머니를 돕기 위해 오신 77세 김영순 할머니도 계셨다.

 

"많이 팔았수? 허허 우리 이제 '봄놀이' 좀 갈 수 있갔어? 추운데 몸 좀 녹이구려."

 

 

조화의 꽃말은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할머니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많이 흘러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 가려다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사람들은 왜 성묘길에 조화를 사는 걸까?' 마침 최할머니로부터 꽃을 사고 있는 손님에게 다가가 성묘를 가는데 조화를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서울에서 온 멋쟁이 가족이였다.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마음인 것 같아요. 조상님 묘를 아름답게 꾸며드리고 싶은 후세들의 마음이죠. 비록 조화이기는 하지만 시들지 않고 활짝 피어 있어서 좋아요. 생화는 살아있긴 해도 시들면 보기가 오히려 더 안 좋아요. 조상님 묘가 아름답게 보이는 건 아주 짧은 기간일 뿐이죠." 

"자주 찾아뵙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그래도 추석때 와서 꽂아드리고 간 조화는 설날 때 와서 다시 새 것으로 갈아 드립니다."

 

최 할머니가 파시는 물건은 물론 '조화'다. 비록 모형의 꽃이긴 하지만 조상님의 묘를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꾸미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은 생화의 그것 못지 않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 덕분에 최할머니는 앞으로도 계속 '마음의 꽃'을 팔 수 있을 것이고, 사흘간 한 장사로 독거노인들을 위한 '행복의 한몫'을 챙길 수가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구자민 기자는 <오마이 뉴스> 7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설날, #조화, #이화공원묘지, #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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