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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인 7월 2일이었다. 그는 조선 이 왕가를 예방해 경의를 표하고 내외 관료들에게도 인사를 했지만 병합 문제를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한국 내각은 더 긴장하며 초초해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월이 되어 날이 무더워졌을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가을 전에는 분명히 한국에서 먼저 추파를 보내리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내각은 가을이 되기 전에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이 여름이 유달리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던 건가?’

데라우치는 여유작작하게 독백해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신들은 온건하게, 무신들은 강경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일본 내에서도 두 기류가 있었다. 데라우치는 때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물론 고마쓰에게 모든 보고를 받고 난 이후였다.

며칠 후 예상대로 이인직은 다시 찾아왔다.

“일전에 말씀하신 조건은 제가 보기에 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라면 이 총리께서도 사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는 찾아 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번 말씀하신 바를 총리께 전해도 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절대 비밀이지만 책임 있는 대신인 이 총리에게만은 말해도 되겠습니다. 만약 다른 곳에 누설되면 저는 배를 갈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아와서 총리의 심중을 이 은사에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소.”

이완용은 3일 후 다시 이인직을 고마쓰에게 보냈다.

“관대한 조건에 사의를 표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아는 이가 생기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일이니 비밀리에 그리고 조속히 시행하자고 하셨습니다.”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무사 출신이므로 복잡한 계산이나 임기응변을 하지 않는 분이오. 공연히 감정을 사서 소탐대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오.”

그들의 최종 면담은 10분 만에 끝이 났다.

고마쓰의 3차 보고를 받은 데라우치는 20년 간이나 조선어 통역관을 지낸 온후한 인물을 뽑아 이완용의 집에 보냈다.

“통감 각하께서 병합의 취지를 전하고 싶으니 한 번 내왕해 주시라는 전갈을 갖고 왔습니다. 다만 세간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할 수 있으니 밤에 오셨으면 하십니다.”

이완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일본에서 호우 피해가 크게 발생하였다. 이완용은 통감 관저에 연락했다. 피해 위로 차 농상무 대신 조중응과 함께 오전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불과 30분 후 이완용은 조중응과 함께 이두마차를 타고 통감의 관저로 들어갔다. 내외신 기자들이 병합 담판이라며 취재 경쟁을 벌였지만 이완용과 조중응은 불과 25분 만에 관저에서 나왔다.

그 시간 동안에 이완용은 통감부에서 작성해 놓은 병합각서를 일독하고는 조중응에게 소지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 국왕을 배려나 한다는 듯이, “한국 원수의 칭호를 대공(大公: 소국의 군주)으로 하자는 건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데라우치가, “예로부터의 칭호인 왕이 더 낳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이완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단 6일 만에 데라우치의 조인 요구에 협조하였다. 황제의 재가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정치 단체의 결성과 집회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원로대신들을 모두 연금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 양도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정부의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 정부에 이양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로써 1910년 8월 29일부로 조선왕조는 건국 27대 519년 만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다음날 영국의 권위 있다는 신문 <더 타임스>지는 “일한병합은 여러 가지 난제를 해결할 유일하고 현명한 정책”이라는 논평 기사를 실었다.

두 달 후인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76명의 조선인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이완용은 가장 높은 백작을, 조중응은 한 단계 낮은 자작을 수여받았다.

매천 황현은 의병 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국정에 관여한 일은 더구나 없었다. 매천은 자신의 글만으로도 나라에 봉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야인이었다. 그가 과거에 두 번 응시한 것은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 다 합격한 것은 시재와 세계관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015수나 되는 시를 생산했고, 역사 정신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는 <매천야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삶은 방랑과 은둔의 반복이었다.

노년의 그는 남도 끝 구례 월곡마을에서 치열하게 집필하고 있었다. 그가 망국의 비보를 전해들은 것은 황혼 무렵이었다. 그는 밤새 눕지 않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붓을 들었다. 그는 절명시 네 수를 지어 남기고는 한 움큼의 아편을 먹고 죽어 버렸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렸다
무궁화 이 세상은 속절없이 죽었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생각하니
지식인 되어 살기가 이렇게도 어렵다


김태수도 합병 소식을 들었다. 벌써부터 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던 터이고, 또 몰랐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서운하거나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최영애와의 결혼을 회피하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이미 아버지는 최영애의 집에 적지 않은 원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혼인을 피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는 마침내 묘책 하나를 생각해 냈다. 그는 아버지가 미구에 자기를 부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 대감이 이번에는 총독부 참여관으로 위촉되셨더구나. 참 그 분도, 조선 대감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관복도 좋으시지. 워낙 쌓아 놓은 학식이 두터우시니까.”

김태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엄중한 음성을 만들어 말했다.

“이제는 네가 대답해야 한다.”

여전히 김태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작은 경련 같은 게 스치고 지나갔다. 김태수는 그대로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다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안다면?”

“최 대감댁 따님과 혼인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얼굴이 금세 풀리면서도 힐책하듯이 말했다.

"바뀐 세상에서 총독부 참여관을 너도 무시할 수 없었나 보구나."
“그러나 아버님, 큰 따님하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 애가 싫습니다.”

“이제 와서 싫은 이유가 뭐지?”
“그 애는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최영애의 동생 최도애가 있습니다.”

“뭐라고? 그 애는 지금?”
“네. 열넷입니다. 이제 2년만 지나면 법적으로도 혼인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아들의 주장과 복안에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래. 나도 아들이 싫어하는 며느리를 꼭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생각 좀 더 해 보마. 으흠” 하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김태수도 같이 일어나며 머리를 숙였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바르게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태그:#통감, #데라우치, #매천, #절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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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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