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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하늘과 땅의 경계를 만들어낸 소나무.
▲ 설경. 하늘과 땅의 경계를 만들어낸 소나무.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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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땅인지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 불가능입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늘 아침까지 닷새나 내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눈은 인간의 손으로 헤집어 놓은 세상의 더러움을 다 덮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덮는데 걸리는 시간이 이렇게 깁니다.

폭설, 지상의 소리를 다 지워내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눈은 돌담도 지우고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내렸습니다. 눈은 인간의 입으로 쏟아내는 모든 말들을 지워냅니다. 말의 덧없음을 하늘도 아는 걸까요. 눈은 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둔 연인이 뱉은 '너만을 사랑해'라는 말까지 지워버립니다.

방 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까지 지우는 눈은 산도 지우고 하늘도 지우며 내렸습니다. 눈이 내리는 동안 만큼은 지상의 싸움소리가 다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눈이 내리는 동안 세상은 고요했으며, 밀린 잠을 푹 잘 수 있어 좋습니다.

눈이 가득한 날 집을 나섰습니다. 엊그제 입니다. 눈길에도 달릴 수 있는 차량의 적재함에 실린 채 길을 떠났습니다. 주인의 외출을 반기지 않은 개가 눈길을 따라왔지만 곧 포기하고 맙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럴때 개는 주인을 기다리며 사람처럼 서럽게 엉엉 운다고 합니다. 본 적이 없어 개가 엉엉 운다는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우는 모습을 본 어머니께서 사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개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상상하면 길 떠나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저를 아끼는 이가 길을 떠난다고 해서 그렇게 울까요. 개는 주인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마지막인양 그렇게 웁니다. 오로지 주인만을 위해 살아가는 개를 보면 셈법에 능한 인간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런 일로 '개 볼 낯이 없다'라는 말도 생겨났나 봅니다.

도로는 제설 작업이 한창입니다. 눈길에 나선 차들은 숫제 엉금엉금 기어다닙니다. 눈 내린 풍경을 감상하기엔 빨리 달릴 수 없는 편이 훨씬 좋을 수도 있습니다. 차량의 적재함에 실려 눈길을 달리는 재미도 큽니다. 눈길이라 덜컹 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기분까지 납니다.

오늘 여행의 목적지는 정선군 동면에 있는 하늘과 맞닿은 마을인 건천리입니다. 전날 밤 정선에서 군산으로 거처를 옮긴 '피리부는 남자'와 술을 마시다 건천리에 사는 김영돈씨 집으로 전화를 넣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눈이 '한 질'이나 왔다며 눈 구경을 오라고 한 게 여행을 나서게 된 이유입니다.

빈집인 듯,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 산촌풍경. 빈집인 듯,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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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잔뜩 이고 있는 나무들이 힘들어 보인다.
▲ 무거워. 눈을 잔뜩 이고 있는 나무들이 힘들어 보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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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리는 해발 700미터에 위치한 마을로 2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래전엔 빨치산의 퇴로이기도 했던 백두대간의 한 줄기가 건천리 마을입니다. 고개를 넘어가면 삼척 땅이 나오고 또 다른 고개를 넘으면 화암팔경이 있는 소금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건천리' 마을

건천리로 가는 길은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과 같습니다. 가파른 길도 길이지만 구불구불한 것이 자칫하면 황천길이 될 수도 있는 길입니다. 치우다 만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길가엔 트럭 몇 대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버려진 듯 눈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사륜차라고 하지만 눈 길을 오르는데 있어 빌빌거리긴 마찬가지입니다. 멋지게 굽은 소나무 한 그루에 얹힌 눈이 하도 아름다워 카메라를 꺼내며 차를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차 세우면 못 올라가요. 아쉽지만 그냥 가지요."

함께 간 이들이 차 세우는 것을 말리고 듭니다. 급경사의 길에 차를 세웠다간 오도가도 못한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모래 한 줌 뿌려지지 않은 길을 오르긴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눈은 계속해 내리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가까스로 고개에 오르니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멀리로는 매 한 마리가 하늘을 크게 선회합니다.

까악 까악 까악 까악
유유히 날아가며 울어대는
유유히 울어대며 날아가는
까마귀 한 마리
홀로 살던 할머니 보이지 않는, 쓰러져가는 집 위 하늘
을 가로질러 숲으로 갔다
어딨니? 모두 어디에 있니?
까악 까악 까악 까악
불러도 대답 없으니, 까마귀 울음소리도 그침이 없이,
내게서 멀어지는 만큼 점점 더 작게, 기어이 숲이 되었다

- 유승도 시 '산에 살던 사람은 산이 되고' 전문

눈이 지상의 모든 것을 덮은 시간, 숲엔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끔씩 가지에 얹힌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가 쩍쩍 소리를 내며 부러집니다. 어떤 소나무는 눈으로 인해 아예 뿌리를 드러내며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덮인 건천리 마을은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습니다. 닭들의 홰치는 소리 또한 들려오지 않는 마을에서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눈발 날리는 산촌의 고요를 깨는 우리들 위로 먹이를 찾아 나선 새들이 포륵포륵 날갯짓을 합니다.

눈이 만들어낸 그림 한 폭.
▲ 선. 눈이 만들어낸 그림 한 폭.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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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을 다리는 중이다. 이틀을 꼬박 불을 때어 칡즙을 만든다.
▲ 뭘까? 칡을 다리는 중이다. 이틀을 꼬박 불을 때어 칡즙을 만든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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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가지 눈으로 가득하지만 나무는 외로워, 외로워 한다.
▲ 외로워. 빈가지 눈으로 가득하지만 나무는 외로워, 외로워 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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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돌아보고 있는데 김영돈씨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어디쯤 와 있냐고 묻습니다. 집 근처라며 곧 도착한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의 집은 폐교의 관사입니다. 정선군농민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우리와는 동지적 관계에 있습니다. 지난해엔 그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이라는 게 주로 세상과 싸우는 일이었던 탓에 그와는 형제 이상의 끈끈함이 있습니다. 올해도 할 일이 많기에 그와는 자주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운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그는 먹을 것을 잔뜩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새해 들어 처음 만나기도 하는 자리라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칡을 달이고 있는 가마 앞에서 감자도 굽고 도루묵도 굽습니다. 산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시원한 물김치도 나옵니다. 얼음이 얕게 깔린 물김치는 시골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입니다. 칡 냄새가 은근하게 나는 가마는 김영돈씨의 겨울 농사터입니다.

그는 가마에 인진쑥도 달이고 더덕과 만삼을 비롯한 약재를 달여 세상에 내놓습니다. 겨울이라고 놀았다가는 굶어 죽기 알맞는 게 농사꾼의 현실이기에 소득을 내기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농사꾼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다들 아는 얘기라 그 힘든 삶에 대해선 잠시 접어 두겠습니다. 

그의 집엔 연변에서 온 분도 계십니다. 예순 일곱을 맞은 그는 김영돈씨의 집에서 농사일을 배웁니다. 지난해 가을이 끝날 무렵 김영돈씨가 함께 살자며 선뜻 손을 내밀었고, 그 분 역시 농사일을 배우겠노라 작심하고 머물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이 신의주라는 연변 아저씨, 긴머리의 남자를 보더니 연변에도 그런 사람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연변에도 공작하는 사람들 머리 기르고 다닙네다. 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네다."

연변 아저씨의 말입니다. 여기에서 '공작'은 예술가를 지칭합니다. 우리도 어릴 적 공작시간이 있었는데, 연변에서는 창작하는 사람을 공작가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연변 아저씨는 술 몇 잔을 마시곤 나무를 패러 나가십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건천리. 움직이는 것은 우리 밖에 없었다.
▲ 건천리 마을.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건천리. 움직이는 것은 우리 밖에 없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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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따듯함이 전해지는 장작. 우리네 삶도 장작 같아야 세상을 뎁혀주지 않을까.
▲ 장작. 보기만 해도 따듯함이 전해지는 장작. 우리네 삶도 장작 같아야 세상을 뎁혀주지 않을까.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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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심심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눈은 자꾸만 놀러온다.
▲ 눈은 계속 내리고. 숲이 심심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눈은 자꾸만 놀러온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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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리자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이 안주 하나씩을 들고 모여듭니다. 시골의 인심이라는 게 그렇게 푸근합니다. 그 시간에도 김영돈씨는 친정 온 딸을 챙기듯 뭔가를 챙깁니다. 겨울이라 별로 챙길 게 없는지 저온저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지난 주엔 인진쑥 달인 것을 한 재씩 우리에게 선물했던 적도 있습니다.

"돼지감자 좀 드릴까요?"
"그거 좋지요. 어머니가 좋아하실 거 같네요."

장터에서 팔 게 없어 고민하는 어머니를 위한 선물입니다. 돼지감자는 인슐린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당뇨에 좋다고 알려진 뿌리입니다. 구황식물이기도 했던 돼지감자는 뚱단지라고도 불립니다. 맛은 아삭아삭 한 것이 감자와 고구마, 야콘의 중간쯤 됩니다.

눈길을 되짚어 돌아오니 집도 눈에 지워지고 없었다

밤이 제법 깊었습니다. 나눈 얘기들이 눈에 갇히는 밤입니다. 아비를 따라왔던 꼬마들도 졸음이 몰려오는지 자주 하품을 합니다. 뉴스에서는 아직도 눈이 15㎝는 더 내린다며 내일의 날씨를 예보합니다. 이미 막소주 두 병이 비워졌고, 술이되 술이 아닌 오가피 원액을 마시며 우리들의 입술은 핏빛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 눈이 언제나 녹을까요?"
"5월까진 남아 있을 겁니다. 여긴 5월까지 눈이 내리거든요."

건천리의 겨울은 다른 지역보다 깁니다. 건천리는 한 해의 절반이 겨울입니다.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노총각인 '양생'이 군불을 지펴 놓았다며 자고 가라고 허리춤을 잡습니다. 그래도 좋고 이래도 좋지만 온 길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법. 술 기운으로 차 있는 밤, 눈길을 떠나보는 것이 더 흥미있을 듯 싶어 집으로 돌가기로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눈발은 그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마을은 눈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디가 길인지 알 수도 없는 시간 돼지감자와 물김치를 챙겨들고 건천리를 떠납니다. 다시 적재함에 실려 온 길을 되짚어 가면서 술에 취한 한 사람은 잠이 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품을 시작하는 운전자를 위해 긴 수다를 떱니다.

한 시간도 더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개가 멀리까지 마중을 나옵니다. 눈이 내린 가리왕산 자락도 백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낑낑아, 우리집은 어디 갔지? 집이 보이지 않는 걸?"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의 소리를 알아들었다는 듯 개는 길도 나지 않은 눈밭을 헤치며 집까지 주인을 데리고 옵니다.

"고맙다, 고마워."

건천리에 온 눈은 40센티가 넘었다.
▲ 눈 얼마나 왔을까? 건천리에 온 눈은 40센티가 넘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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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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