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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고귀한 나무는 나이테가 빽빽하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라고 법석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어제(17일) 해거름 녘에 보물 제209호 동춘당이 있는 동춘당공원을 거닐었다.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가 매우 간결하다. 그 많은 잎은 다 어디로 떠나보냈는지 단 하나의 이파리도 달고 있지 않다. 느티나무는 자신의 삶을 저렇게 간략하게 갈무리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닌 현자(賢者)다.

 

젊은 시절, 헤르만 헤세는 내 영혼의 스승이었다. 한편 헤세의 스승은 나무였다. 그는 "나무는 내게 언제나 제일 절실한 설교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계보를 따지면, 제자의 제자이니 난 나무의 손자뻘인 셈이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섬기는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그의 나이테와 옹두리에서 온갖 투쟁과 고뇌와 질병 그리고 그가 맛보았던 온갖 행복과 성장의 과정이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고생스러웠던 해와 무성하게 자랐던 해 그리고 잘도 견뎌냈던 공격과 참아냈던 폭풍이 모조리 씌어져 있다. 농사꾼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단단하고 고귀한 나무는 나이테가 빽빽하다는 사실, 가장 굳세고 힘차며 모범적인 줄기는 높은 산 위나 항상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안다. - 헤르만 헤세의 <방랑> 42쪽 (범우사 간)

 

위대한 존재인 나무에겐 약간 불경스럽기도 하지만, 사람도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나이테가 빽빽한 나무일까, 아닐까. 고백하지만, 난 결코 나이테가 빽빽한 나무는 아니다. 높은 산 위에서 자라지도 못했고, 위험과 고난 속에서 자라지도 못했다. 적당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출 줄 알고, 적당한 높이에서 꿈을 내려놓을 줄도 알았다.

 

내 안의 뜨거운 피를 속이는 삶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삶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더라도, 내 삶의 풍경이 얼마나 끔찍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은 다시 돌아와서 내게 말한다. 더는 반성 없이 두루뭉술하게 살지 말라고. 뼈 아픈 각성을 요구한다. 황지우 시 '12월'은 반성하고 싶을 때 꺼내 읽는 시다.

 

우리는 가로수 밑의 生(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는 청소부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 황지우 시 '12월' 전문

 

황지우 시인은 1980년 '연혁(沿革)'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후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등 많은 시집을 상자했다.

 

그는 시에 대한 정통적인 관념을 부수는 형태 파괴적 시 쓰기를 통해 날카로운 풍자와 강렬한 부정의 정신을 보여준다. 풍자와 부정의 정신이 가득한 그의 시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아련한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시가 지닌 마력일 것이다.

 

시 '12월'은 시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미래사, 1991)에 실려 있는 시다. 시인은 시속에서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라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어찌 삶이 12월이 와서 갑자기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동안은 반성 없이 그냥 살아오다가 비로소 반성을 시작하자 눈에 띄게 된 것일 뿐일 터.

 

그런데 왜 시인은 느닷없이 아내를 부르는 걸까. 아내가 자신의 삶의 불결에 원인을 제공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삶의 누추함과 불결성을 함께 투덜거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투덜거림의 끝에 이르자, 시인은 마침내 "희망은 유혹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희망은 (부질없는) 유혹일 뿐"이라고 고쳐 읽으면 뜻이 더 명확해질는지도 모르겠다. '부질없는' 대신에 '어처구니없는'이란 말을 대신 넣어 읽어도 좋으리라.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이 시에 대한 모티브를 얻은 장소가 연말 바겐세일을 단행하는 백화점 쇼윈도 앞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바겐세일을 단행하는 백화점 쇼윈도 앞을 지나면서 어쩌면 시인은 '내 생도 바겐세일 하고 싶다'라고 중얼거렸을는지 모른다.

 

황지우 시인에게 12월의 거리는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듯한 환상에 빠질 정도로 불법 주차가 판치는 거리다. 마치 시간이라는 "힘센 차"가 "고장난 차" 같은 내 삶을 견인해 가는 것 같다. 시인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렉카에 끌려가는 "고장난 차" 같은 삶을 지켜볼 뿐이다.

 

시인은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청소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언제까지 쓸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계속해야 하는 것이 청소라는 작업이다.

 

만회한다는 건 얼마나 명예로운 것인가

 

반성이란 아주 낡은 방식이다. 12월의 반성은 일조의 관행이다. 반성의 습관성을 배척하면서도 반성 외에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별 뾰쪽한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네 삶이 처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어제저녁엔 오랜만에 김윤아의 2집 앨범 <유리가면>에 실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의 제목은 할리우드 통속극의 거장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을 번안하여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만든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에서 따온 것이다.

 

배르너 파스빈더 영화의 특징은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희망이 있으리라고 믿는 관객의 기대를 끝까지 외면해 버리는 비정함에 있다. 삶은 그렇게 우리의 기대에 쉽게 부응하려 들지 않는다. 삶의 희망이 불안에 잠식되기 시작하면 차라리 눈뜨고 싶지 않은 아침이 계속된다는 게 내 경험칙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내용물로 가득 찬 삶일지라도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삶이란 발바닥의 각질 같은 것이다. 깎아내면 또 다시 생겨난다. 살아가야 할 날이 또 다시 주어진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만회한다는 건 얼마나 명예로운 것인가.


태그:#12월 ,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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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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