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로수의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던 날이었다. 길가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이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해 질 무렵,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가는데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은행잎이 떨어져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니 서둘러 잎새를 떨궈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에 은행잎 몇 장만이 남아 추위에 떨고 있다. 줄 타는 곡예사의 슬픈 몸짓처럼 아슬아슬하게 가지에 붙은 애처로운 모습이 친정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내일은 시간을 내어 신촌 친정에 다녀오리라 다짐했다.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버리고 마는 엄마

 

다음 날 서둘러 일을 마친 후,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 가게를 부탁하고 나니 신촌까지 갔다 올 일이 심란해졌다. 게으름이 도진 탓도 있었지만 갑자기 영하권의 추위로 뚝 떨어져 버린 매서운 날씨도 한몫 거들었다.

 

거리를 뒹구는 낙엽들이 세찬 바람에 어디론가 정처 없이 휩쓸려 가고 사람들은 외투 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을 하니 내 마음도 자꾸만 따뜻한 안방을 찾아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떨고 들어올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사골 국물을 구수하게 고아 따뜻한 저녁상을 차리고 싶은 마음이 엄마에게 다녀오리라 하던 다짐을 누르고 말았다.

 

마음은 늘 엄마에 대한 애잔함으로 가득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버리고 마는 엄마! '다음에 가지 뭐'하는 생각으로 엄마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을 꾹꾹 누르며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골뼈 위로 아른거리는 엄마의 하얀 얼굴

 

고소한 사골국을 좋아하는 아들 녀석이 저녁에 돌아와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장바구니를 펼치는데, 속이 꽉 찬 핑크빛 사골뼈 위로 기름기 없는 엄마의 하얀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이놈을 푹 고아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고 대파를 송송 띄워 드시면, 엄마가 올겨울을 거뜬히 나실 것만 같은 생각이 굴뚝 같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주방을 몇 차례 왔다갔다 서성이다가 사골을 그대로 둘둘 말아 들고 신촌으로 내달렸다.

 

교통사고를 당하신 후, 대문출입도 어려울 것만 같았던 엄마가 주위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이제는 옆집 마실도 다니고 자식들의 도움 없이도 교회를 출입하실 만큼 회복되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저녁 준비할 시간에 쫓겨 '엄마, 저 가요!' 하며 사골만 던져놓다시피한 채 숨 한 번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이 차올랐다.

 

잘했소, 첫눈이 낭만적이오!

 

냉장고를 뒤져 감자와 애호박을 뚝뚝 썰고 두부와 버섯을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 저녁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한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신촌 갔다 이제 왔다"고 답장했더니 "잘했소, 첫눈이 낭만적이오!"라며 창밖을 보라고 한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목화 솜 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가로등 불빛 아래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있었다. 마음이 포근해져 왔다. 첫눈을 맞으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리며 따뜻한 밥상을 준비한다.


태그:#엄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