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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뉜 청주의 속현
 
토요일(24일), 연기군 비암사를 다녀오려고 길을 나선다. 신탄진역에서 기차를 탄다. 오늘 여행은 아주 짧고 간단히 끝날 것이다. 연기군 누리집은 조치원역에서 봉산 향나무-연화사-고복저수지-비암사까지의 거리를 1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탄진에서 조치원역까지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기차 안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운 좋게 좌석을 차지하고 나서 기형도의 시 '조치원'을 떠올린다. 5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시 속 화자가 서울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밤기차 안에서 만난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돼 있다. 비정한 서울 생활에 지친 한 사내의 귀향을 그렸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 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 기형도 시 '조치원' 일부
 
내게 이 시는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의 속편으로 읽힌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일부)하던 대합실의 사내가 기차에 오른 후 옆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옮겨 놓은 것 같다. 물론 기형도의 시 속 사내는 사평역 아닌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지만.
 
어려서부터 기차를 타고 조치원역을 지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이곳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완전히 초행길이다. 그러나 시의 영향 탓인지 모르지만, 내게 조치원과 연기군의 이미지는 매우 쓸쓸하게 다가온다.
 
고려 현종 이래로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누어진 청주의 속현이었다. 그리고 공주 반포면에 가까운 연기군 금남면 지역은 오랫동안 공주에 속해 있기도 했다. 행정구역이 현재와 같이 고착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였다. '행복도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되면 연기군은 또다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대전과 연기군 혹은 조치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연기군에 과연 들여다볼 만한 문화재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이쪽으로 쉽게 발길을 떼도록 하지 않았다.
 
10여년 전, 청주박물관에서 비암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았다.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40.3cm)과 보물 제 367호 기축명아미타불제불보살석상(56.9㎝),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40cm)이 그것이었다. 크지 않지만 아주 정교하고 우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유물들은 박물관에 가 있지 않은가.
 
그 유물에 매료된 나머지 언젠가 비암사라는 절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간다 간다 하고 애기 셋 낳고 간다"라고 하지 않던가.
 
효자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봉산리
 

 

연기군 누리집의 설명을 따라 우선 조치원읍에서 멀지 않은 봉산리로 향한다. 마을 들머리에 이르자, 정려각 한 채가 나그네를 맞는다. 어머니의 병환이 차도가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는 효자 최회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불효자인 나를 거북스럽게 한다. 옳은 것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면 껄끄럽고 거북한 법이다. 그러나 옳은 것을 따르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무릅써야만 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보다는 차라리 거북함을 택하고 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 일생은 많은 거북함과 마주쳐야 했다.

 

향나무를 찾아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측백나무에 속하는 향나무는 중국이 원산으로 우리나라 정원수 가운데 대표적 수종이다. 엄동설한에도 꿋꿋함을 잃지 않는 상록수라서 효와 정절을 상징한다. 하긴 향나무뿐 아니라 나무는 어떤 나무든지 간에 모두 인간의 스승이 아니던가.

 

이 향나무는 강화 최씨인 최중룡(崔重龍)이 집안에 효자와 열녀가 많이 나오기를 빌면서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40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키는 어른의 가슴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가지가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 마치 네모난 우산처럼 퍼져 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면 마을이 평화롭고 좋은 일이 있고, 쇠약해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꿈에 석불이 나타나 현몽하길래

 

 

 
봉산리에서 연화사가 있는 월하리까지는 지척이다. 길가에 군데군데 구기자나무 덩굴이 우거져 있다. 새벽에 내린 빗방울을 머금은 구기자 열매가 매우 영롱하다. 아름다운 것은 그냥 내버려둬도 저절로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
 
연화사는 낮은 산을 등진 채 북향하고 있다. 사주문 식으로 된 대문을 들어서면 곧장 법당과 마주친다. 전각이라야 법당과 산신각, 외따로 떨어진 슬레이트 건물에 있는 관음전뿐이다. 이 절은 예로부터 있던 고찰이 아니다. 1893년 홍문섭씨가 창건한 것이다. 어느 날인가 그의 꿈에 석불이 나타났다. 현몽한 장소를 파보니 높이 50㎝가량 되는 비 형식의 돌에 새겨진 석불 2점이 나왔다. 그래서 석불을 고이 모셔둘 사찰을 지은 게 연화사라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이 유물들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렇게 비 형식으로 된 납작한 돌에다 새긴 불상은 처음 본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칠존석불상의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보이며, 무인명석불상 부대좌의 본존불은 반가사유상이 분명하다.
 
절을 창건한 홍문섭이란 분은 도대체 얼마나 원력이 센 분이었을까. 이 돌부처님들이 1000년 세월을 넘어 그에게로 전해진 걸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니다. 혹시 그는 전생에 그 돌에 부처를 새겼던 석공이었는지도 모른다.
 
운치 있긴 하지만 반 다이어트적인 정자
 
 
"공양을 들고 가라"는 공양주 보살의 말씀을 애써 뿌리친 채 연화사를 나선다. 서면사무소에 들러 비암사의 위치를 확인한다. 나이 지긋한 직원께서 그림을 그려 설명해준다. 쌍류초등학교를 그려넣더니, 그 윗길로 가라고 한다. 아마도 쌍류초등학교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나 보다.
 
동사무소 바로 옆 성제리 정자나무 옆의 정자가 멋지다. 보기는 좋은데 기능은 어떨까 싶어 일부러 자리에 한 번 앉아 본다. 여름날에 여기 누워 한 소금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면 나같이 깡마른 사람도 살이 오르리라. 우리나라 정자는 운치 있고 정서적이긴 하지만 반 다이어트적인 건물이다. 그게 유일무이한 흠이다.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고복저수지 4km, 비암사 6km라 적혀 있다. 6km라, 이렇게 좋은 날씨엔 능히 걸을만 하군.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 약간 들긴 했지만, 애써 지운 채 걸음을 재촉한다.
 
고복저수지는 연기군 군립공원이다. 저수지치고는 상당히 큰 축에 속한다. 여기저기에서 강태공들이 고기를 낚고 있다. 저수지 위를 나르는 물새떼들이 "아저씨들이 뭔데 우리 밥을 축내요? 아저씨들은 기득권이란 것도 모르세요?"라고 항의 시위를 하건만 강태공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수면을 응시할 뿐이다. "쇠귀에 경 읽기"보다 무서운 게 "강태공 앞에서 시위하기"가 아닐까.
 
 
저수지의 끝에서 연기대첩비라는 기념비를 만난다. 비문을 읽어보니,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 이곳까지 쳐들어온 몽고 합단적이란 적을 정좌산과 원수산에서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현재에도 정좌산에는 큰창고개, 작은창고개, 전당골, 승적골, 군량골과 같은 지명이 전하며 원수산에는 장군바위와 항서바위(항복을 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라는 지명이 전한다고 한다. 변방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런 지역사를 자꾸 발굴하고 전해서 향토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작업이 많이 이뤄졌으면 싶다.
 
대첩비를 지나자, 길이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이정표를 보니, 비암사까지 5.8km나 남았다. 이정표가 정말 '엿장수 맘대로'다. 지금까지 걸은 것만 해도 7~8km는 너끈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쯤에서 돌아가 버릴까. 그러나, 내 사전에 중도 포기가 웬말인가. 2km가량을 더 걸어가자, 그제야 쌍류 초등학교가 나타난다. 면사무소 직원이 그려준 약도가 시작되려는 지점이다.
 
인가도 드문 데다 줄곧 고바윗길이 이어진다. 사방골이라는 곳에서 '원일 신도비각'을 만난다. 절충장군 첨사를 지낸 분이다. 1808년, 마량진 수군병마절도사를 지낼 때 관내 백성 105명이 사경을 헤맸는데 이를 구하여 왕으로부터 양마 1필과 포상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백제 유민들의 혼을 달래는 비암사

 

 

가파른 고개를 올라선 다음 다시 고개를 내려간다. 서서히 지쳐갈 즈음 눈앞에 다방리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안에 들어가서 비암사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만, 마을 안 길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심정이 비로소 이해가 간다. 다방리- 나의 아메리카, 나의 서인도 제도.

 

비암사는 국사봉과 금성산 등으로 둘러싸인 운주산 기슭에 있다. 돌계단에 올라서자, 커다란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조치원 역을 출발한 지 5시간이 걸려서야 비암사에 도착한 것이다.

 

비암사의 창건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백제의 역대 임금과 대신들의 영혼을 위한 천도사찰로 지어진 백제의 마지막 사찰인 셈이다. 이렇게 깊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 절이 들어앉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키인 셈이다. 현재도 양력 4월 15일에는 괘불을 걸고 백제대제를 거행한다고 한다.

 

비암사는 그윽하고 조용하다. 승방인 심검당 문 앞에 붙여진 국보 제106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과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불제불보살석상, 보물 제 368호 미륵보살반가석상 사진이 옛날을 웅변하지만,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없음이여.

 

전각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느티나무 옆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그토록 먼 거리를 걸어서 이곳에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여행의 묘미 가운데는 쓸쓸함도 들어 있다. 쓸쓸함은 결코 비애가 아니라 조용한 즐거움이다. 쓸쓸함이 주는 조용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니 내 도보여행은 그만큼의 대가를 받은 셈이 아닐까.

 

여행이란 마지막 외투조차도 버리는 것

 

 
비암사를 나와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다시 다방리 마을을 지나간다. 집집마다 김장을 하느라 부산하다. 부엌문이든 창고 앞이든 어김없이 시래기가 걸려 있다. 시래기가 걸려 있는 풍경은 언제 어디서나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언젠가 시래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머니란 음식으로  기억되는 존재"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시래기 된장국이, 시래기죽이 그립다. 담벼락에 기대어선 아이 하나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덜구에 天上水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라갔다 - 백석 시 '秋冬日(추동일)' 전문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연기군은  복숭아 재배지로 유명하다. 백석의 시가 이 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성맞춤을 얻는구나.

 

오늘 내 여행을 결산해 볼 시간이다. 처음 떠나올 때 생각했던 것처럼, 역시 연기군에는 뛰어난 비경은 없었다. 가슴 뛰게 하는 유물도 없었다. 그러나 괴이한 풍경, 신기한 풍물에만 매달리는 것은 오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눈만을 만족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눈이 만족하지 못한 대신 청각·후각·미각·촉각이 만족을 얻었으면 그리 나쁘지 않은 여행이다.

 

반성하노니, 그동안 나의 여행은 너무 편협된 것이었다. 제아무리 구석진 땅,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풍경일지라도, 그곳이 우리의 국토인 한 가야 할 이유는 얼마나 많은가. 이십여 리를 걸어나와 조치원역행 버스를 탄다. 기형도 시인은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이라 했지만 여행이란 사실 그 한 개의 외투조차도 버리는 거라는 걸 깨닫는다. 창 밖 어둠이 위안처럼 스르르 감겨든다.

덧붙이는 글 | *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라갔다.- 백석 시 '初冬日'의 한 구절. 시라리타래란 시래기를 길게 엮은 타래를 말한다.


태그:#연기군, #연화사 , #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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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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