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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이 붙인 이름, 천태산

 

충북 영동으로 산행을 떠난다. 오늘(10일)은 천태산(715m)을 오른 다음 영동읍으로 갈 것이다. 양산면 명덕리 쪽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누교리에서 오르는 길보다 훨씬 멀지만 등산객이 드물고 한가한 맛이 있다.

 

산자락마다 단풍이 제법 보기 좋게 물들었다. 이윽고, 그 옛날 북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 곳에 도착한다. 감나무 한 그루가 홀로 묵상에 잠겨 있다. 억새들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마치 감나무에게 우리가 곁에 있으니 외로워 말라는 듯이. 천태산 능선을 바라본다. 동남쪽을 향해 뻗은 곡선이 완만하다.

 

천태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대각국사 의천으로 알려졌다.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1046~1083)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서 천태교학을 익히고 돌아온 그는 이 산에 있던 절을 국청사라 부르고 지록산이었던 산이름을 천태산이라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주차장에 이르자, 은행나무가 반긴다. '어서 와. 나 요즘 심심해서 떨어지는 나뭇잎 개수나 세며 살아. 요새는 백까지 세고 나면 숫자를 잊어버려. 그래서 첨부터 다시 세야 해. 작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정말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 보네 그랴.' 영국사 은행나무는 이 땅에서 천 번의 가을을 겪은 분이다.

 

'천태산에 올랐다가 이따가 다시 올게요.' 정면에서 볼 때 약간 오른쪽에 있는 길을 통해 천태산을 오른다. 민가 오른쪽 산길이다.

 

작은 배려가 주는 커다란 기쁨을 맛보다

 

 
길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등산객을 맞이하는 건 '등산코스 안내도 보관함'이다. 오른쪽 길가에서 쓰레기통을 고친 듯이 보이는 통 속에는 복사해 담아 둔 등산 안내도가 들어 있다. '천태산 산악회' 이름으로 된 이 안내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천태산 지킴이 배상우씨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등산객에게 베푸는 그의 따스한 마음이 실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태산의 등산코스 개발부터 암릉 곳곳에 설치된 로프까지 전부 이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천태산 전체가 양산면 소재지인 가곡리에서 약방을 경영한다는 그가 개설한 약방 같다. '친절한 상우씨, 두고두고 복 많이 받을 겨.'

 

고마운 마음으로 지도 한 장을 꺼내 든다. 조금 더 올라가자 이번엔 오른쪽 골짜기에서 홀로 절대고독을 씹고 있는 집 한 채가 보인다. 처마 아래에 매달아 놓은 곶감 줄이 마치 하나의 오브제처럼 산속 집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산타기의 묘미를 만끽하게 하는 암벽 등반
 

 

올라갈수록 길이 가파르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길엔 로프가 설치돼 있어 잡고 올라가도록 해 놓았다. 바위길을 올라가다 내려다보면 영국사 주변 풍경이 옛날 70년대 이발소에 걸려 있던 그림처럼 다가온다.

 

구부러진 길이 만드는 평화, 꼬막 껍질 같은 작은 집이 보여주는 태평스러움. 몇 걸음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을…. 멀리 주었던 눈길을 걷어 곁에다 눈길을 주면 암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빚어낸 탈속한 풍경이 마음을 씻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로프를 붙잡고 암릉을 탄다. 이제 끝났는가 싶으면 다시 암릉 코스가 기다린다. 그러나 이곳의 암벽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 부닥친 암벽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경사가 70도 정도 되는 듯하다. 길이는 75m. 이 코스를 오를까 하다가 암벽 옆으로 난 우회등산로를 택한다. 암벽타기의 묘미를 그냥 지나쳐야 하는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오늘의 일정을 감안한 끝에 힘을 비축해두기로 결정 내린다.

 

우회등산로 역시 그렇게 만만한 등산로는 아니다. 가랑이 사이에 넣은 로프를 잡고서 조금씩 올라간다. 산에선 아무리 낮고 우습게 보이는 지형지물이라도 절대 방심은 금물이다. 적당한 긴장과 안도감이 교차하면서 산타기의 묘미를 만끽하게 한다.

 

 잡념과 아집을 버린 등산객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시 헤어졌던 두 길이 다시 만난다. 바람이 시원하다. 길옆 바위 위에 올라서서 영국사를 내려다 본다.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등산객의 모습이 멋지다. 긴장과 스릴을 느끼면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쓸데없는 잡념이나 헛된 아집을 버렸을 터. 그렇게 만들어낸 모습이기에 저리도 아름다운 것인가.

 

다시 산을 오른다. 쉬지 않고 앞으로만 가도 병이지만 너무 오래 쉬어도 병이다. 오래 쉬면 몸이 굳기 때문이다. 중도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난 세상살이고 정치고 간에 중도를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우습다. 대체 중간이 어디란 말이냐. 그 중간을 알려주면 나도 기꺼이 중도파가 되마.

 

동남쪽 능선을 따라 눈길을 주니, 저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가 닿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던 영동 분에게 산 이름을 물으니 갈기산이라 한다. 말갈기와 흡사하다 하여 갈기산이라 했다 한다.

 

암릉이 끝난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영국사를 내려다본다. 크고 작은 나무들 속에 둘러싸인 풍경이 무척 평화롭다. 이다음에 죽어서 서방 정토에 간다면, 어쩐지 영국사 부근의 모습과 닮은 풍경일 것만 같다.

 

등산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것

 

 

완만한 능선 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니, 마침내 천태산 정상이다. 천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정상에는 금산군 연합산악회 이름이 적힌 표지석이 서 있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충남 금산군과 영동군의 경계라는 걸 떠오르게 한다.

 

산행의 묘미는 어디까지나 조망에 있다. 그러나 날씨가 잔뜩 흐린데다 키 큰 나뭇가지에 가려 멀리까지 바라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동서남북을 돌아가며 차근차근 조망한 다음 바위에 앉아 잠시 쉰다. 슬며시 우스운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이 산을 천태산이라 부르는 건 바위와 암벽의 생김새가 천태만상이라서 그런가.

 

비가 오려나. 날씨가 몹시 꾸무럭거린다. 그만 산에서 내려가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정상에서의 머무름은 짧고 산을 오르는 과정은 길다. 등산은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등산은 모순의 세계이다. 산을 오르면서는 의지를 다지는 법을 가르치고, 정상에서의 재빠른 내려섬은 허무를 가르친다. 오르기는 힘들고 더딘데 내려서는 건 잠깐이다.

 

산불과 담배, 그리고 어쭙잖은 나의 금연사

 

 

안내도에 D 코스라고 표시된 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간다. 오를 때와는 달리 아주 편안한 길이다. 군데군데 불에 탄 고사목이 서 있다. 2005년도 4월 말에 일어난 산불이 할퀴고 간 결과물이다.

 

애연가였던 내가 담배를 끊은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IMF 사태 후 하루 두 갑씩 피우던 담배를 단칼에 끊었다. 당시엔 시간 날 때마다 지체장애인 단체를 드나들던 때였는데 그곳의 장은 내 금연을 방해하느라 장난을 치곤 했다. 자꾸만 술자리를 만들고 노골적으로 담배를 권하곤 했다. 그러나 난 이를 악물고 담배를 끊었다.

 

속으로 "이틀만 담배를 안 피우면 시집 두 권을 살 수 있다"며 자신을 격려하면서 제아무리 술이 떡이 되더라도 담배를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은 하루만 안 피워도 거의 시집 한 권 값이 생긴다.)

 

담배를 끊기 전 기억을 돌이켜 보면 산에서 피우는 담배가 가장 맛있었던 같다. 산 공기가 좋아 아주 폐부 깊숙이까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맛이 일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산불 난 흔적을 볼 적마다 담배 끊은 나를 자화자찬하곤 한다.  

 

'조망석'이라 표시된 바위에 올라서서 풍경을 조망한다. 멀리 충남 금산 제원면의 산자락이 보인다. 이제 막 절정을 넘긴 단풍잎들, 주변의 산 빛이 비단처럼 곱다. 산길을 조금 내려오니 남고개다.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피나온 고려 공민왕이 옥새를 숨겨 놓았다는 옥새봉으로 가는 길은 막아 놓았다.

 

예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육조골이 있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 등 6조가 있던 곳이라 해서 육조골이라 했다니 제법 오랫동안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영국사로 가는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보물 제532호 영국사 부도가 있는 산 기슭으로 올라간다. 영국사 부도는 안녕하시다. 주변 생태계도 산불이 일어났던 2005년보다는 많이 안정을 찾은 듯하다. 산불이 나고 나서 며칠 후 이곳에 들렀을 때 참혹했던 광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마침내 영국사에 당도하는 것으로 산행의 끝을 맺는다. 다시 영국사 은행나무에게로 다가간다. 그새 이파리가 많이 떨어졌는지 앙상하다. 하긴 오늘 바람이 오죽 많이 불었는가.

 

'이봐 나 이제 떨어지는 이파리 개수 세는 거 아주 포기했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니, 당최 셀 수가 있어야지.' '이거 왜 이러십니까, 삶이란 기다림의 과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하하, 이 늙은이를 멋쩍게 만드누만!' 은행나무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태그:#영동 , #천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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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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