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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응모작입니다. 나기환 시민기자는 한양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중입니다. [편집자말]
여행의 묘미는 준비하면서 설레임, 보고 느끼면서의 희열, 끝난 후의 갈무리 3단계로 나뉜다. 27살. 정열의 20대도 아니고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의 발을 뗀 30대도 아닌 27살 중간에 무작정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27살 여름. 빠른 친구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했거나 대부분은 사회생활을 준비하고 있을 때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길게 20대 초반을 보내고 그 대가로 약간(?) 늦은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철이 좀, 아니 한참 덜 들어서 일테다. 학창시절 즐겨부르던 노래 가사처럼 '철들어 간다는 것이 한몸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면 철들지 않을테다'는 자세로 세상의 속도에 맞섰더니 세상은 냉정하게 기다려 주지 않고 훌쩍 먼저 가버렸다.

7월 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대학입학 후 거의 처음으로 주어진 한달이라는 자유로운 시간을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배낭여행. 목적지보다는 훌쩍 떠나는 여행에 방점을 찍은 인도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인도로 난 숨어 버렸다. 여행을 떠나기로 맘을 먹고 30분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낙점된 곳, 인도. 이유는? 뭘까. 아직도 모르겠다.

무작정 예약 먼저 한 인도행 티켓으로 인도여행은 시작되었다.
▲ 인도행 비행기표 무작정 예약 먼저 한 인도행 티켓으로 인도여행은 시작되었다.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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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갠지스 강, 간디 등을 떠올리며 무작정 비행기 표부터 예약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가이드북 한권과 컴퓨터 앞에서 계획표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여행의 첫번째 묘미를 즐기다 보니 출발일이 되었고,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완성한 15kg의 배낭을 메고 그렇게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드디어 가는구나!

 '이젠 실전이야,여긴 인도라구', 인도의 수도 델리.

첫 해외여행의 설레임과 무한리필되는 삿포로 맥주(이거 상당히 비싼거다 한국에서는)는 12시간여의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고 긴장이 풀릴 때쯤 비행기는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기가 어찌나 덥고 습한지 찜찔방에 온 듯 하고 향신료와 땀과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으로 어우러진 냄새는 어찌나 '향긋'한지 풀어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기에 충분했다. '그래, 내가 인도에 진짜 왔구나'

많은 인구만큼이나 이동수단의 문제도 크다. 도로는 항상 혼잡 그 자체다.
▲ 대낮의 델리 시내 많은 인구만큼이나 이동수단의 문제도 크다. 도로는 항상 혼잡 그 자체다.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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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의 주된 관문지는 역시 수도 델리다. 대부분의 배낭여행객들은 델리로 입국해서 3,4일 인도 적응기간을 거친 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각지로 흩어진다. 여행을 준비할 때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통해 인도여행의 '가상훈련'을 한다면 델리에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실전훈련'에 들어가는 셈이다. 훈련은 상당히 가혹했다.

6월의 인도는 아침에 35도로 시작해서 낮에는 45도를 넘나든다. 사람많기로 이름난 인도의 수도 델리는 어딜가나 사람 천지이고 덥고 습한 날씨와 맞물려 불쾌지수는 극도에 이른다. 이것을 이겨내고 3,4일의 델리여행을 무사히 '완수'한 여행객들이 각지로 떠나게 된다. 실제로 델리에서 중도하차하는 여행객들이 꽤 많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특히나 교통혼잡은 정말로 '서프라이즈' 그 자체다. 엄청난 사람들이 살다보니 교통혼잡도 엄청날 수 밖에 없고 어딜가나 도로는 차와 오토릭샤와 걸어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차,소를 뺐구나.)

어느 순간 운전사와 함께 '레이싱'을 즐기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 오토릭샤 뒷자리에서 어느 순간 운전사와 함께 '레이싱'을 즐기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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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토릭샤는 일종의 택시 개념인데 혼잡한 도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운전사들의 운전솜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탑승한 후에는 100% 부딪친다는 '짜릿함'을 몇번 겪고 나서야 도착지에 도착한다. '터프'한 운전솜씨에 짜증이라도 낼라치면 여유있게 'NO PROBLEM!'을 외쳐대는 오토릭샤에 적응을 하고 어느 순간 함께 '레이싱'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나도 웃을 수 밖에..'이제 적응훈련을 통과한건가?'

간디는 말했다. 'My life is my message.' 그는 자신의 삶으로 말했고, 그의 삶은 인도의 정신이 되었다.

인도하면 떠오르는 인물, 간디. 종교적 갈등와 아직도 위력을 무시못하는 카스트 제도가 서슬퍼런 인도에서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라 평가받는다. 실제로 몇몇 인도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하나같이 간디 이야기에는 모두가 경건하면서도 자신있게 존경과 자긍심을 표현했다. 나는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그런 인물이 있나? 나라를 상징하는, 모두가 존경할 수 있는, 자랑할 수 있는 인물, 지도자. 세종대왕? 단군? 그렇게 멀리까지 거슬러야 하는건가.

단정하고 우아하게 정돈된 간디의 묘는 인도의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 간디의 묘, 라즈 가트. 단정하고 우아하게 정돈된 간디의 묘는 인도의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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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사람 살기에도 좁은 델리지만, 간디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과시라도 하듯이 간디의 묘인 '라즈 가트'는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게 단장되어 있다. 갠지스 강으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 만큼이나(그 정도에는 못 미치겠지만..^^;) 많은 인도인들이 라즈 가트를 찾고 있었다. 땅덩이가 어느 대륙 부럽지 않은 인도이기에 인도인들도 해외여행 오는 기분으로 델리에 오기 때문에 외국 여행객 만큼이나 인도 여행객들도 많았다.

꼴까다(옛 영국식으로 캘거타)에서 온 가족 여행객을 만났는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나를 너무 신기하게 바라봐서 (외국인을 처음 보는지..아님 내가 신기하게 생겼는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는 외국인에게 간디가 어떤 존재인지를 궁금해 했다. 순간 아이의 수준높은 질문에 당황하고, '하우 머치? 웨얼아유 프럼?'류의 기초적 회화에 익숙해져 가던 나에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또 한번 당황하며 그냥 가이드 북 보고 왔다고 하려다가 아이에게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진땀을 흘려가며 간디는 테레사 수녀님과 함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요지(?)의, 마지막에 인도는 정말 훌륭한 나라인 것 같다는 아부까지 덧붙여 이야기해 주었다.

영어 대화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고마운(?) 소년이다.
▲ 꼴까다에서 온 소년과 함께. 영어 대화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고마운(?) 소년이다.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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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소년의 자긍어린 표정과 흐뭇해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식은 땀을 닦으며 라즈 가트 길 건너 에 있는 간디 박물관으로 향했다. 간디 박물관은 그야말로 간디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단정된 박물관의 안팎은 생전의 검소했던 간디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듯 했다.

2층의 간소한 시설이지만 차분히 돌아보면 볼수록 간디의 모습과 생각, 생활을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었다. 손수 물레 돌리는 간디의 모습, 간디의 일기, 간디의 옷가지. 사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신념을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의의 폭력' 앞에 '평화'로 맞선다는 것은 종교적 선구자의 모습일 순 있어도 앞장서 그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지도자로서는 현실에서의 '비겁한 도피' 아닌가. (역시 난 아직 세상에 철들지 못한 피 끓는 20대인건가.) 적극적 행동을 주장했던 네루의 정신이 간디에게 '밀리는' 것. 이것이 현실을 개척해 나가기 보다 순응하는데 익숙한 인도의 모습, 그 뿌리이지 않을까.

적과 맞설 때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 왜 그래야 하지?
▲ 간디박물관 앞 상징물 적과 맞설 때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 왜 그래야 하지?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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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간디는 평생을 그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헌신했다. 독립 후에도 종교갈등의 정 가운데에서 인도의 화합에 앞장서다 '종교인'의 총탄에 쓰러졌다고 한다. '오, 신이시여!'라는 말을 남기며... 어쩌면 간디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아닌 정말 종교적 구도의 삶을 살았을 뿐일지도모른다. 혹은 그렇게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랬고, 부처, 알라신이 그랬듯이... 절대적 헌신과 사랑, 봉사의 마음으로. 다만 그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억압하는 이들'이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요구해 온 게 문제였던게지. '폭력을 써서 저항하지 마라''평화적으로 표현해라'.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진짜 했는지 의심스러운) '악법도 법이다'와 함께 악용되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한다.

간디는 그의 말대로 그냥 그의 삶을 통해 메세지를 보여주었을 뿐..

   'My life is my message.'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 삶이....

그는 삶을 통해 그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 간디박물관 외벽에 새겨진 간디의 말. 그는 삶을 통해 그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 나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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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에서의 2박3일 인도 적응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인도여행의 필수코스. 타지마할이 기다리고 있는 아그라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태그:#인도여행,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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