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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환 기자는 한양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어차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한 인도 배낭여행객들도 인도의 음식, 사람, 날씨에 지쳐갈 때쯤 찾아가는 맥그로드 간즈는 친근감가는 티벳 사람들과 음식이 반가운 곳이다. 히말라야 산맥이 코 앞에 펼쳐져 있는 인도 북부의 조그만 마을 맥그로드 간즈는 티벳인들의 망명정부가 있는 곳이다.

 

중국의 티벳 지배에 반발한 달라이 라마와 티벳 사람들은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이곳에 정착했다. 중국과 국경 분쟁으로 대립하던 인도는 이들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산비탈을 일궈 지금의 맥그로드 간즈라는 마을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달라이 라마의 '티칭'을 들으러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되었다.

 

맥그로드 간즈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바라나시에서 기차로 18시간을 달려 도착한 하리드와르에서 저녁6시 버스로 갈아타 밤새 달려 새벽 6시에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합승택시로 20분을 달려야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 맥그로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도는 땅덩이가 넓고 교통수단이 부족한 만큼 이동하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다. 시골버스 불편한 의자에서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길을 밤새 달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가끔 만나는 간이 휴게소에서 '짜이'(인도 홍차)라도 한잔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역이다.

 

 

고된 여정 끝에 도착한 새벽녘의 맥그로드가 얼마나 반갑던지.. 때마침 내가 도착한 주에 달라이 라마의 '티칭'이 있어서 맥그로드는 여행객들로 북적였다.(덕분에 방을 구할 수가 없어서 고생했다.) 티벳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다 보니 달라이 라마가 직접 티칭을 하는 일정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보살의 화신'이라고 한다. 지금은 14대 달라이 라마로,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승려들로 구성된 추대위원회에서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 태어난지 49일이 안된 아이를 티벳 전역에서 찾아 추대한다고 한다.

 

 

그렇게 추대된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초'. 불운하게도 그는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커다란 벽을 만났고 1959년 중국의 탄압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이곳 인도에 정착했다. 그때 달라이 라마를 따라온 티벳인들이 일군 마을이 지금의 맥그로드 간즈이다.

 

남의 땅에서 눈치 살림하는 처지여서인지 티벳인들은 다른 인도에서 보기 힘들었던 유대감,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의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다음날인 7월 1일은 '하늘열차'라 불리우는 '칭짱열차'가 개통하는 날이었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공사를 성공시킨 중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환영할 일이었지만, 티벳인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티벳의 열차 개통이 티벳의 급속한 중국화를 촉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날 맥그로드의 거리에서는 티벳 독립운동단체의 '하늘열차'개통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있었다. 유인물과 함께 항의의 표시로 팔에 검은 띠를 묶어주고 있었다.

 

 
열차를 타고 티벳으로 이주해오는 중국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티벳인에게서 삶의 터전과 문화, 언어를 빼앗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은 이들에게 엄청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거대 중국에 맞서 독립을 꿈꾸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이들을 기다리며 터전을 지키는 티벳인, 티벳이 사라진다면 이들의 꿈은 그대로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테니까..
 
실제로 많은 티벳 사람들에게서 '뜨거운' 독립의 열망은 찾기 힘들었다. 오랜 피난생활의 고단함과 40년이라는 시간은 피난지를 그들의 따뜻한 터전으로 변모시키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국과 음식이 너무 비슷해 너무 반가웠던 맥그로드에서 자주 찾았던 카키식당의 주인 아주머니는 한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히말라야를 넘었다.
 
이제 그는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그에게 티벳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눈에 잡히는 현실의 공간은 아니었다. 아주머니를 업고 히말라야를 넘었을 부모 세대는 이제 얼마남지 않았고, 그렇게 티벳은 상상 속의 고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의 망명생활의 시작과 과정, 현재를 모두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갔다. 2층으로 아담하게 꾸며진 박물관은 소박함에 비해 알차고 의미가 깊었다. 사회주의 중국과 티벳은 공존할 수 없었을까.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군에 파괴되는 티벳 사원과 사원 파괴를 막으려는 승려들이 탄압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은 현실이었고, 보는 사람에게 그대로 역사로 다가왔다.
 
문화대혁명은 좌편향의 오류였다고 평가하더라도 사회주의 실현과 티벳 사회는 공존이 불가능한 창과 방패였을까. 사회주의 중국의 입장에서는 분명 티벳은 제정일치의 봉건사회의 모습이었을테고, 인민을 위한 개조의 대상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중국에 티벳 '인민'들은 달라이 라마를 따라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넘는 것으로 대답했다.
 
목숨을 건 대장정으로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얻은 마오쩌둥의 티벳에 대한 구애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왜 실패했을까. 이민족에 대한 중화주의의 문제인가.
 
'아이러니하게' 맥그로드를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은 대만인들이었다. 달라이 라마를 따라 히말라야를 넘은 티벳인, 장개석을 따라 바다를 건넌 대만인들. 슬쩍 같은 범주에서 묻어가려는 얕은 마음이 얄밉다.
 
 

한동안 나의 발목을 잡았던 사진 한장. 아버지와 아이는 무사히 히말라야를 넘었을까.

 

티벳 사람들의 순수하고 소박함이 정겨우면서 왠지 착잡해지는 도시, 맥그로드 간즈다.

 

 


태그:#인도배낭여행, #맥그로드 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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