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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존재였느냐

 

- 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 전문

 

다 타고 난 연탄재 같이 버려진 이들이 있다. 전직 광부들이다. 연탄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이들의 억센 힘이 필수였다. 연탄은 한때 우리네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에너지였다.

 

산업 전사들, "우리는 산업 폐기물이 아니다"

 

▲ 갱목시위를 하고 있는 전직 광부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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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겨울준비의 첫걸음은 연탄을 들여놓는 일이었다. 가득 쌓인 연탄을 보면 한 두끼를 굶는다 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1990년대 에너지 정책이 바뀌면서 정부는 '석탄합리화' 정책을 단행했다.

 

탄광은 하나 둘 문을 닫았고 막장에서 탄을 캐던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고 막노동 판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이미 막노동을 하기에도 힘들어진 상태가 돼 있었다.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진폐. 진폐는 탄가루가 폐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불치의 병이다.

 

지난 11월 7일 오후 2시 강원도 태백. 인생 막장인 탄광에서 일생을 보낸 이들이 광부 복장을 하고서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 연못에 모여들었다. 한때 광부로 석탄을 캐내던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회원들이다.  

 

황지 연못에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은행잎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뚝뚝 떨어졌다. 그들은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면서 지난 삶에 대한 회한보다는 울분과 분노에 차 있었다. 손에는 삽과 곡괭이, 톱 등이 들려 있었고, 머리에는 '사생결단'이라는 구호가 적힌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그들이 조용하던 황지연못에 모인 이유는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산업 역군으로서 이 땅의 석탄 에너지를 생산해내던 그들이 이젠 산업폐기물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집회 현장에 모인 전직 광부들의 평균 연령은 70대. 다들 진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손자 손녀들 재롱이나 지켜보면서 노년을 보내야 할 이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만든 것은 이 나라의 정부다.

 

노동부는 스스로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해

 

이들은 이날 집회에서 정부를 향해 ▲ 노동부가 약속한 생활보조비(월 73만원)를 지원할 것 ▲ 엉터리 진폐심사, 판정체계 개선책을 마련할 것 ▲ 재가진폐환자 유족보상 지급방법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 ▲ 진폐환자 권익대변단체, 양대 진폐협회 운영비를 지원할 것 ▲ 강원랜드는 매년 진폐환자복지사업 50억, 폐광지역 교육환경개선 사업으로 50억 원을 추가 지원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한 요구 조건의 근거는 2001년 노동부가 발표한 생계비보조 약속. 그러나 노동부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진폐환자는 3만여 명. 이 중에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은 3500여명 뿐이다. 진폐 환자의 대부분이 가정에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날 집회를 마친 이들은 노동부 태백지청으로 향했다. 거리행진에 나선 이들은 어림잡아 500여명. 집회 때 혈서를 쓴 성희직(시인)투쟁위원장은 갱목 시위에 나섰다. 성 위원장과 갱목시위에 동참한 이는 전찬학(76) 할아버지이다.

 

이들 두 사람은 갱목을 등에 지고 거리를 걸었다. 탄광에서 그러했듯 등에 질 수 없는 상황일 땐 배밀이로 갱목을 옮겼다. 성 위원장의 몸은 단식투쟁 15일 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노동부를 향해 일갈하는 목소리도 여전했다. 그날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주 눈물을 보였다. 힘이 드는지 가끔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보름간의 단식으로 지친 몸을 한 성 위원장과 76세의 전찬학 할아버지. 두 사람의 처절한 갱목 시위는 보는 이들의 눈에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산업전사 경력 30년의 '여전사' 이무희
릴레이 단식투쟁 9일째 단식 대열에 동참했다
사람은 기본을 지켜야한다는 고운 얼굴의 여 전사
"이게 다 내 일인데요..." 하며 머리띠를 질끈 맨다.
선탄장에서 석탄먼지와 싸워 훈장으로 얻은
진폐13급이라 숨은 가빠도 구호만은 야무지다
한 많은 탄광촌 세월 세상풍파 다 겪고 나니
이제는 겁날 게 없다며 작은 주먹 불끈 쥔다.
협심증으로 남의 심장 달고 산 세월 벌써12년
진폐증에 심장병에 날마다 약을 달고 산단다.
'터미네이터' 같은 불굴의 여전사 나이 70에도
남자보다 강한 당찬 모습 가슴이 뭉클하다.

 

2

메모질 꺼내들고 산전수전 이야길 졸라보니
24살에 탄광촌 찾아온 인생보따리 끌러 보인다.
태백에서 덕대하든 남편회사 탄광사고 났었는데
화약계장 대신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단다.
유치장에서 몰매 맞아 영영 일손 놓아버린 남편
그 길로 선탄부 생활로 2남 2녀 키운 이야기 눈물겹다
5년을 누워 지낸 남편 대소변 수발에 허리 휘고
"다른 집은 다들 아빠가 일하는데 우리 집은 왜 맨날 엄마만 일하고 그래?"
철 없는 아이들 투정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단다.
혼자 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 다 이겨내고
이제는 제몫 하는 아들 딸들 대견하고 고맙단다.
어머니 심성 닮은 막내딸은 시인이 되었단다.

 

3
불굴의 여전사 이무희…, 꽃보다 더 아름답다.

 

-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투쟁위원장 성희직 시 '불굴의 여 전사 이무희를 말한다' 전문 
 
이날 집회에 참여한 이들 중엔 여성들도 제법 많다. 광부 일이라는 게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닌 까닭이다. 너나 없이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여성들도 탄광으로 출근했다. 이무희(71)씨도 그렇게 일을 하다 불치의 병을 얻었다. 오랜 탄광 일로 이들의 가슴엔 '산업 전사'라는 훈장 대신 진폐증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웠다.

 

진폐환자들의 집회 현장엔 기침소리만 가득하고

 

황지연못에서 노동부 태백지청 사무소까지 이르는 500여 미터 길. 갱목 시위를 하는 이들이나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나 다들 힘들어 했다. 여기저기에서 나는 기침소리들. 찬바람을 오래 쐰 탓일 것이다. 한편 주응환 한국진폐재해자협회장은 시위 도중 병증이 악화되어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상황은 집회 참여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이들이 노동부 태백지청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엔 경찰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노동부장관에게 보내는 상자를 소장에게 전달만 하겠다는데 경찰이 길을 막아선 것이었다. 환자들의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뭐가 두려워. 담장을 밀어버리고 들어가자구!" 

 

곡괭이를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는 70대 노인의 말에 모두들 건물 담장으로 몰려갔다. 80년 사북항쟁에서부터 폐광지역특별법을 만들어낸 3.3 투쟁까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온갖 투쟁의 현장에 있던 이들이라는 걸 노동부는 간과했던 듯 싶다.

 

약속을 지켜야 할 정부는 묵묵부답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길 없다는 게 담배를 피우는 이유들이다. 실제 그들은 몇 모금 빨지도 못하고 기침을 쏟아냈다.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했잖어. 이 자리에서 죽고 싶어? 죽기 싫으면 절대로 담배 피우지 마."

 

동료들이 말리고 나서야 그들은 담배를 껐다. 건물 벽에 기대어 기침을 쏟아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산업폐기물이 아니라 차라리 쓸모 없이 버려지는 연탄재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탄재를 또 발로 차는 이 세상이란.

 

집회 참가자들의 분노가 들끓자 투쟁지도부가 협상에 들어갔고 한 시간여 만에 길이 뚫렸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 이들은 투쟁의 의지를 담은 시너통과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진폐환자를 위문하던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요구사항이 든 상자를 전달하고 자진 해산했다.

 

이들 중 일부는 정선군 고한으로 돌아가 단식 투쟁을 이어간다. 오늘(9일)로 단식 17일 째를 맞은 성희직 투쟁위원장은 "30일 예정으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요구조건이 수용되지 않으면 60일, 아니 100일이라도 단식을 하겠다"며 "우리의 죽음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면 기꺼이 목숨도 내 놓겠다"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는 오는 15일 지도부 삭발을 계획하고 있으며 단식 한 달을 맞는22일 이후엔 대규모 생존권확보 궐기대회를 준비 중이다. 요동 치는 대선 정국의 한귀퉁이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이들의 투쟁이 얼마나 주목을 받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정부는 아직 묵묵부답이다.

 

 


태그:#진폐증환자, #산업폐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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