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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은행에서 새로 발행될 5만원권에 들어갈 인물을 신사임당으로 정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여성들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한 기사를 보니 여성들이 신사임당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해놓았습니다.

 

'부계혈통 사회의 대표적인 현모양처상을 대변해 적극적인 사회활동이라는 현재의 여성상과는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

 

기사 뿐 아니라 개인 블로그에서도 신사임당을 반대하는 의견을 적은 글이 많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여성분들이 신사임당이 고액권 화폐 인물로 선정된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시는 여성분들이 많은 지금 남성 위주의 시각이 많이 반영된 '현모양처'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신사임당이 그리 편하게 느껴질리 없을 것입니다. 여성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얘기를 한 번만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사극 <이산>을 보면 이산(훗날 정조)이 도화서 다모로 일하고 있는 어린 시절 동무 성송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화원이 되도록 해보거라."

 

여자이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있으나 화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송현에게 꿈을 가지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비록 허구성이 가미된 사극이긴 하나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게 해준 대목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해도 여성이라 하여 차별받는다면 그녀가 그린 뛰어난 작품도 결국은 빛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후세들을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송현이보다 무려 100년도 더 앞에 살았던 여성 중에 자신의 작품을 지금까지 남긴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의 이름은 바로 신사임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사임당'하면 '율곡 이이'를 떠올리고, '자식을 잘 키웠다'는 생각 때문에 곧바로 '현모양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모양처 신사임당? 여류화가 신사임당!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지금까지도 작품을 남기고 이름을 남긴 뛰어난 여류화가이기도 합니다. 지금과 달리 시대가 여성의 사회 활동을 제약하는 시기에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 이름을 날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며 반발하고 있는 여성분들이 이 점을 먼저 가슴 깊이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사임당은 여성의 사회 참여가 극도로 어려웠던 시대, 여성들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작품과 이름을 남기는 여류화가 신사임당이라는 존재를 '현모양처 이미지라서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과를 올렸던 여성에 대해 실례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굳이 그런 여성이라면 신사임당 말고도 여류시인 허난설헌도 있는데 굳이 '현모양처'라는 말이 꼭 따라 붙는 신사임당을 택한 것이 그래도 못 마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도리어 '현모양처 여류화가'라는 그 이미지 때문에 신사임당이 5만원 지폐 인물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난설헌은 여류 시인이기는 하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으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여성, 능력도 가정생활도 원만한 여성 과연 어느 여성이 많은 국민들이 보는 화폐 인물로 적합한 것일까요? (역사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말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사회가 점점 더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를 가진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확정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착한 아내'이기도

 

송강호가 열연한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에 보면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극중에서 송강호는 외국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냅니다. 그의 아내도 아이들을 따라 외국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 모습이 담긴 영상물이 집에 배달됩니다.

 

송강호는 기뻐서 재빨리 VTR에 비디오 테이프를 넣고 보기 시작합니다. 행복하게 웃는 아내와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송강호도 처음에는 행복하게 웃습니다. 그런데 비디오를 보는 동안 라면을 먹고 있던 그의 어깨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그맣게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먹던 라면을 집어 던지며 펑펑 울면서, 화를 냅니다. 무엇이 느껴지시나요?

 

'현모양처'에서 '양처'는 '착한 아내'를 뜻합니다. 물론 부인 외에도 첩을 둘 수 있었던 시대에는 투기하지 않는 그런 여인을 착한 아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법으로 간통을 금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이기에 그 시대 '양처'의 의미는 물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뀐 만큼 '착한 아내'라는 의미도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 '착한 아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착하다'는 의미에 주목해서 생각해봅시다. 지친 남편을 위로하고 진심으로 아껴줄 수 있는 그런 아내를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가족이라기보다 돈 버는 기계로 느끼는 남편이 많아질 수록 더욱더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는 아내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은 국내에 남아서 돈을 벌고 해외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줍니다. 자신이 곁에 있지 않아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요? 돈을 버는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과연 누가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영화 뿐 아니라 실제로 언젠가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한 남성이 자신의 친딸을 성폭행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남성은 자신은 죽어라 돈을 벌어서 가족들에게 보내주었는데 가족들은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해주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것 같아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이유로도 그 남성의 행위를 정당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그런 지경에 이르기까지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느낀 고독감이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남성의 아내가 남편에게 조금만 더 사랑과 애정을 보여주고 이해해주려는 노력을 했다면 약간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위의 예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사실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도 생활 수기나 소설 등에서 아버지가 스스로를 그저 집에 돈 벌어다 주는 기계처럼 인식하는 표현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정일에 소홀하고 대화에 익숙하지 못한 남성들의 잘못이 제일 큽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착한 아내라면 한 번쯤은 먼저 그런 남편을 보다듬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을 보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도 이 신사임당을 본받아서 현모양처가 될 수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한다면 물론 많은 여성분들이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런 남성들의 고정 관념을 우려해 많은 여성분들이 신사임당을 반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분들이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착한 아내인 내가 우리 남편 요새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위로 좀 해줄까?"

 

제 말은 신사임당을 보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하는 구시대적 발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을 한 번 떠올릴 수도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현모양처'의 '현모' '어진 어머니'라는 뜻 때문에 신사임당을 5만원권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시대가 애타게 바라는 어진 어머니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분명히 많은데 모든 분들이 어진 어머니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진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 입장에서 단 한번이라도 아이가 세상을 바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노력이 필요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음식점이나 공공 장소, 지하철, 버스 등을 타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보다 못해 한 마디 하면 '죄송합니다'라는 말보다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당신이 뭔데 우리 아들 기죽여'

 

이런 식의 반응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을 제대로 보면서 자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아이에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남보다 나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진 어머니는 분명 필요한 여성상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하는 이라도 어머니 눈물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고,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자식을 보다듬어 주는 것도 어머니입니다. 날이 갈수록 격하고 힘들어지는 이 세상에서 지폐 속 신사임당을 보면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제 생각이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인 것인가요? 사실 저는 신사임당으로 5만원권 모델이 결정되었을 때  많은 여성분들 주장처럼 신사임당이 남성 위주 시각에서 바라본 현모양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대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에서 바로 떠오르는 어머니라는 이미지 덕분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를 사랑해주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열심히 살겠습니다.' 라는 다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라도 저는 5만원권 신사임당을 보면서 그럴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셨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겠다고 다시 다짐하게 되는 그런 제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반드시 '자아실현'을 하고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했던 여성상이라고 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살기 힘들어지는 시대에 우리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상은 온 국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을 수 있는 그런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온 국민이 쓰는 지폐에 그런 어머니상이 들어가 매일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분명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불투명했던 지폐 모델 선정 과정이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설령 투명했다 하더라도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모델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요?


태그:#신사임당, #화폐 인물,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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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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