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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삼층석탑과 극락전
 봉정사 삼층석탑과 극락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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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왔으면 도산서원과 하회마을부터 둘러봐야 하는 것 아녀?”

지난주 청송 주왕산 등산을 마친 후 안동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주변명소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서자 일행 한 사람이 도산서원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안동을 찾은 대개의 사람들이 당연히 둘러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명소는 아무래도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두 곳을 제쳐놓고 우선 영주 쪽으로 가는 5번 국도로 진입했다.

약 5km쯤 달렸을까,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오른편 언덕 숲 속에 작은 기와집과 함께 조금 옆으로 비켜서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눈에 잡힌다. 입구에는 제비원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제비원이 뭐하는 곳이지?”

절 이름도 아니고, 정체가 아리송한지 일행 한 사람이 또 묻는다. 몇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정체가 드러났다. 작은 기와집은 연미사라는 작은 절이었다. 연미사 앞을 지나 조금 옆으로 나아가자 문제의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두 개의 바위 사이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남녀가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바라보인다. 바위 사이 입구에는 검은 대리석 기단 위에 서있는 석상이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뭐랄까, 하체에만 옷을 걸쳤을 뿐 윗몸을 드러낸 사내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깨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내는 왼손에 석등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제비원 미륵불 바위 입구 석상
 제비원 미륵불 바위 입구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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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 미륵불(이천동미륵불석상)
 제비원 미륵불(이천동미륵불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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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가득한 제비원

“저 위를 한 번 올려다봐요?”

우리를 안내한 안동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제법 높직한 바위 위에는 부처상의 얼굴이 올려 있었다. 커다랗고 육중한 바위 꼭대기에 올려 있는 작은 부처의 머리 부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부처가 바로 유명한 제비원의 미륵불입니다.”

그 사이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행 한 사람은 어느새 그 앞에 엎드려 삼배를 올리고 있었다.

“이 제비원은 토속무속인 성주풀이의 원류지요, 아주 유명한 전설만 해도 5가지나 있답니다.”

이 미륵불상이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천동석불상인데 실제로는 제비원 미륵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지금은 매우 초라한 모습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여행객 편의 제공을 위한 시설인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가 있어서 사람들이 연미사 또는 제비원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마애불상은 본래 고려시대의 것으로 높이가 12미터에 이르렀는데 커다란 바위를 이용하여 몸체를 바위에 새기고 머리 부분은 다른 돌로 만들어 얹은 형태다. 아주 특이한 모습의 제비원과 미륵불, 그리고 연미사를 둘러보고 내려와 다시 길을 나섰다.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성주야, 성주로구나, 성주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의 솔씨 받아
공동산에 던졌더니만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군(黃腸君)이 되었구나, 조리기둥이 되었구나.
낙락장송이 쩍 벌어졌네, 대활연(大豁然)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 고전무속 '성주풀이'의 사설 앞부분


“본래 이 안동지방이 토속무속인 성주의 본향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안동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안동이 토속무속인 성주의 메카인 셈인데 막상 안동에는 이 제비원 외에는 다른 어떤 문화적 자취도 없고 상징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제비원과 미륵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많았다. 먼저 연미사의 전설은 이랬다. 이 고을에 연이라는 처녀가 살았는데 인색하기로 소문난 이웃마을의 김씨 아들이 연이를 짝사랑하다가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갔다.

염라대왕은 김 총각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죄가 너무 많이 쌓여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인데 건넛마을의 연이는 선행의 창고가 가득하니 좀 꾸어다 쓰면 살아 돌아가게 해 주겠다"

봉정사 입구 노송
 봉정사 입구 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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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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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총각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신의 재물을 연이에게 많이 나누어주었는데 연이는 그 재물로 절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기와를 얹던 와공이 그만 지붕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죽었는데, 그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 부르게 되었고, 이 지역을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전쟁이 끝나자 조선의 방방곡곡을 두루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만한 명당자리마다 혈(穴)을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여송이 말을 타고 이곳 제비원 앞을 지나가는데 말이 우뚝 멈춰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여송이 주위를 살펴보니 언덕 위에 커다란 석불이 우뚝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여송은 말이 가지 않는 이유가 불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미륵불의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바로 그때 불상의 목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쏟아졌는데 이를 본 이여송은 깜짝 놀라 바삐 도망쳤다는 것이다. 바위 위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때 이여송의 칼에 잘린 미륵불의 머리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던 스님이 발견하여 목을 제자리에 얹어놓고 횟가루로 붙여놓았다고 한다.

봉정사 가는 길에는 정감이 묻어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 달리는 사이 승용차는 벼가 누렇게 고개 숙인 논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안동은 들이 별로 없는 산간지방이다. 그런데 그 산골 넓지 않은 들녘에 황금 물결로 일렁이는 볏논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제비원에는 그 외에도 몇 개의 전설이 더 전해지고 있었다. 제비원 미륵불을 조각한 형제 이야기와 제비원과 법룡사의 절짓기 시합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전설을 들으며 천천히 달리는 논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깐 달리자 이번에는 작은 마을과 밭들이 산자락 아래로 펼쳐져 있다. 그 밭들은 파란 채소로 가득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수확이 끝난 들깨와 콩, 그리고 고구마밭도 보인다.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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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쪽 사립문과 고금당
 영산암 쪽 사립문과 고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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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빨갛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밭들이 계속 이어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 가을에 수확하는 열매 중에 사과만큼 탐스럽고 아름다운 과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 사과밭 가운데를 천천히 달리며 바라보는 주변 경관에서 정감이 뚝뚝 묻어난다.

사과밭 길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길이 끝나는 곳에 봉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자 저만큼 약간 높은 위치에 천등산 봉정사라는 현판을 달고 서 있는 건물이 보인다.

호젓함과 아늑함에 젖어 있는 봉정사

2층 누각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고색창연한 모습이어서 정다운 정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 왼편에는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듯한 노송 한그루가 2층 누각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동지방에서는 제일 큰 절이라는 봉정사는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먼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고풍스러움과 소박한 정감을 주는 만세루를 살펴보았다. 절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만세루는 건축양식이 특이하여 앞쪽에서 바라볼 때는 2층이었으나 뒤쪽에서는 단층이었다.

지형을 이용한 건축술로 조선조 숙종 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덕휘루였으나 언제부턴가 만세루로 바뀌었는데 이유나 연대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누각 위에는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고, 송판 마루 위에는 가을걷이를 한 고구마와 감자, 그리고 산나물을 말리고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어디선가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독경소리가 조용조용 울려 퍼진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따라가 보니 마당에 3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 극락전 안이었다. 신라시대의 건축물인 극락전은 국보 1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고, 3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이었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대덕이 창건하였다. 지금은 천등산이라 불리는 원래의 산 이름은 대망산이라 했는데 능인 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어여쁜 여인이 수행을 방해하고자 유혹을 하였으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인이 바로 선녀였다. 선녀는 능인대덕의 수행에 감복하여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그래서  굴 이름을 천등굴이라 불렀고 산 이름도 천등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능인대사가 종이로 학을 접어서 도력으로 날렸다. 그리고 그 종이학이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는데 봉정사가 세워진 전설이다. 절 이름은 대사가 날린 종이학을 봉황에 비유하여 봉황이 내려앉았다는 뜻으로 봉정사라 했다는 것이다.

봉정사는 오랜 역사를 지켜오면서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55호인 대웅전, 화엄강당은 보물 제448호, 고금당은 보물 제449호, 그리고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은 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땅에 묻어 놓은 김장독
 땅에 묻어 놓은 김장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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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의 북과 마루에 널어말리는 가을걷이들
 만세루의 북과 마루에 널어말리는 가을걷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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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에 싸여 있는 경내를 돌아보고 고금당 앞마당에 서니 오른 쪽 언덕 위에도 몇 채의 건물이 바라보인다. 영산암이었다. 언덕 위에 따로 떨어져 있는 영산암은 암자라기보다는 부잣집 안채처럼 아늑한 분위기였다.

“이 봉정사와 영산암에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라는 영화를 촬영했지요, 분위기나 풍경이 남달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전에 영국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도 이곳에 들렸다고 하던데.”

사찰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는 가을햇살이 따스하다. 영화촬영도 영국여왕의 방문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사찰의 규모는 작았지만 고풍스러움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우리나라 산사를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비원과 봉정사에 전해오는 수많은 전설들, 길과 주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멋과 정감이 깃들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태그:#가을여행, #제비원, #미륵불, #봉정사,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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