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듬이질 풍경(한밭교육박물관 모형).
 다듬이질 풍경(한밭교육박물관 모형).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 정다운 다듬이 소리

현대 문명은 세상에 없던 수많은 소리를 탄생시켰다. 비행기가 뜨고 앉을 때 내는 굉음과 자동차의 경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문명이 낳은 소리들은 예외없이 대부분이 불협화음이다. 이 파열음이 닿는 순간, 귓속의 달팽이관은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이렇게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수없이 탄생시킨 문명은 그만큼 많은 소리를 세월 밖으로 추방했다. 소달구지 소리, 도리깨질 소리, 상엿소리, 다듬이 소리 등이 그것이다. 특히 깊어가는 가을에 듣는 다듬이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묘한 무늬를 만들곤 했다. 완벽한 음악적 구조를 갖춘 아름다운 소리였다. 어렸을 때, 난 이 다듬이 소릴 아주 좋아했다.

해거름이면 할머니는 약간 덜 마른빨래를 걷어 오신다. 빨래의 솔기를 펴고 너덜너덜한 실밥을 뜯어내고 나서 네 귀를 맞춰 둘로 접으신다. 그리고 막내 고모를 불러내어 빨래의 한 쪽을 잡게 한 후 양쪽에서 팽팽하게 힘을 주어 살살 잡아당기신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고모가 세게 힘을 주어 당겨 버리면 할머니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만다. 어느 한순간 할머니가 빨래를 놓치시면 이번엔 고모의 윗몸이 앞으로 쏠려 넘어진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되풀이하고 나서 할머니는 빨래를 다시 귀가 딱 맞게 접어 옥양목 보자기에 싸서 두 발로 자근자근 밟는다. 그러다 보면 구김이 서서히 펴진다. 할머니는 이윽고 쪽마루에 있는 다듬이 위에다 빨래를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할머니와 고모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다듬이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처음 자진모리로 시작된 다듬이 소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중모리로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휘모리로 바뀌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그렇게 적멸을 가르며 점점이 태어난 소리들은 가을밤의 허공을 흔들어 깨우고, 그 울림이 만드는 동심원은 점점 넓어져 내 마음 깊은 곳에까지 와 닿는다. 난 어쩐지 다듬이 소리가 만드는 평화가 좋았다.

또닥또닥 또닥또닥 또닥 딱딱딱 따다닥 딱딱딱딱….

다듬이 소리에 따라 방안의 호롱불이 고요히 흔들린다. 그럴 때면 행여라도 호롱불이 꺼질까 봐 난 가슴이 조마조마하곤 했다. 어린 나이지만 어쩌면 그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내 유년의 추억 속에서 떠오르는 가장 정겨운 소리의 하나인 다듬이 소리. '또닥또닥'이란 다듬이 소릴 나타내는 의성어 속에는 우리 어머니의 들숨과 날숨이 묻어 있다. 멀어질 듯 가까워지고 가까워질 듯 멀어지는 투박하고 경쾌한 그 소리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겪은 가장 원초적 모음(母音)이었다.

'또닥또닥'. 이 평화스런 의성어는 사람의 마음속 상처를 달래고 보듬어 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다듬이 소리는 단순히 옷의 주름을 펴는 소리에 머물지 않고 삶의 구김살까지 펴주는 신명나는 소리인 것이다. '또닥또닥'은 또한 아이를 어루는 의성어이기도 하다. 아기에게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자라는 수신호이기도 한 것이다.

시의 소재로 즐겨 썼던 다듬이 소리

예로부터 우리나라 시인들은 물론 백거이 등 중국 시인들도 다듬이 소리를 시의 소재로 즐겨 썼다. 또 한국 고가 연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고 양주동 박사(1903. 6. 24~1977)는 1938년에 나온 <현대조선문학전집 시가집>에 실린 시에서 "피마자 등불조차 / 가물가물 조을고 있을 이 밤중인데 /  안악네들 얼마나 눈이 감기고 팔이 아플가 / 아즉도 도드락 소리는 그냥 들리네"(시 '추야장이수' 일부)라고 썼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1993년에 나온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라는 시집에 실린  '내 어머님 노래는'이라는 시에서 유안진 시인은 다듬이 소리를 "산천도 잠 못자며 따라 울던 단말마"이며 "모질게도 추운 가슴의 얼음 깨던 계면조"라고 표현한다.

내 어머님 내방가사는 달빛에 젖은 가락
간난의 시집살이 초가집 저녁연기도
바늘귀 밝히는 밤마다 달빛에 젖던 메나리조


내 어머님 노래는 한겨울밤 다듬이소리
모질게도 추운 가슴의 얼음 깨던 계면조

산천도 잠 못자며 따라 울던 단말마여

팔십생에 밤에만 울던 내 어머님 노래는
수몰된 고향마을 눈물 차오른 임하댐
마음놓고 소리 높여 울으셔도 좋은 이제는


맵고 아린 청솔내음새도 못을 박던 다듬이소리도
어디에 가라앉아 버렸나 깊이 모를 푸른 침묵뿐
이 넉넉한 눈물세상을 물무늬 혼자가락을 타누나.

- 유안진 시 '내 어머님 노래는' 전문

시작 생활 40년, 이 연부력강한 시인은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구원을 모색해온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그가 추억하는 것은 다듬이 소리가 아니다.  다듬이 소리를 통해서 어머니를 추억하는 것이다.

물에 잠긴 고향 임하댐에 와서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어디에 가라앉았는지 알 수 없으며 깊이 모를 침묵만 흐를 뿐이다. "이 넉넉한 눈물세상을 물무늬 혼자가락을 타누나"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혼자 가락을 타는 것은 물무늬가 아니라 시인 자신일 터.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어느덧 환갑을 넘긴 '굴뚝각시'의  나태주 시인. 그가 2000년도에 펴낸 <슬픈 젊은 날>이라는 시집 속에 실린 '다듬이질 소리'는 매우 특이하다. 소리가 가진 '빈부의 격차'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듬이질 소리도 다듬이질 소리 나름이어서
부잣집 다듬이질 소리는 '다다곱게 다다곱게'로 들리고
우리같이 가난한 집 빨래는 기운 곳이 많아서 시쿤둥한 '붕덕수께 붕덕수께'로 들린다던가!"
- 나태주 시 ''다듬이질 소리' 전문

물론 부잣집 다듬이질 소리와 가난한 집 다듬이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농담이 만드는 웃음의 뒤끝에 찾아드는 건 씁쓸함이다.

'다다곱게 다다곱게' 소리를 내든지, '붕덕수께 붕덕수께' 소리를 내든지 간에 이젠 어디에서도 그 정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옷을 세탁하고 다리는 데 쓰는 자동세탁기와 전기 다리미는 과묵하기 짝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입도 벙긋하는 법이 없다. 이제 다듬이 소리는 우리의 귓전에 환청만 남긴 채 영영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가.

사라져 가는 소리를 기억하기 위하여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다듬이 소리를 안타까워하는 것은 시인들만이 아니다. '가람과 뫼'라는 두엣은 일찍이 1983년에 낸 음반에서 "시어머니 그 소리는 뚝딱뚝딱 뚝딱뚝딱 / 며느리의 그 소리는 똑딱똑딱 똑딱똑딱 / 잘도 넘어가네(노래 '다듬이 소리' 일부)"라고 노래한 바 있다.

누가 뭐래도 다듬이 소리에 대한 음악 중에서 가장 압권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1997년에 낸 음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에 실린 '또닥또닥'이 아닐까 싶다. 다듬이 소리를 피아노로 재현한 이 곡은 두 번째 트랙에 실려 있다.

우리의 전래 동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피아노로 연주한 이 음반에서 임동창은 특수 제작한 피아노를 사용했다. 본래의 피아노 소리가 너무 둔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아노 조율사인 서상종씨에게 "쳄발로의 음색과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가진 피아노를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은 햄머 경화제와 아크릴을 혼합하여 햄머 헬트(hammer felt)에 바르는 것으로써 원하던 소리를 얻게 된다. 그렇게 개조한 피아노로 연주하는 '또닥또닥'은 피아노 소리보다는 쳄발로의 음색에 더 가깝다. 임동창이 연주하는 애조 띤 피아노 소리를 듣노라면 마치 옛날로 돌아가는 듯 마음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임동창의 피아노 소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본래의 다듬이 소리만 하겠는가. 그가 연주하는 소리는 어디까지나 '짝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이 들면 젊었을 적보다 쉽게 마음이 저문다. 마음이 자주 아주 작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막막함에 잠길 때가 있는 것이다. 그냥 아무 소리라도 들렸으면 싶을 때, 나는 다듬이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나도 모르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노래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더구나 난 내 젊은 날의 소중했던 꿈과 노래들을 단 하나도 마음에 간직해두지 못한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래도 내 마음속 덧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다듬이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을 어찌 하랴.

또닥또닥 또닥또닥 또닥 딱딱딱 따다닥 딱딱딱딱….


태그:#다듬이 소리 , #유안진 , #나태주 , #임동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