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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사자암을 나서 적멸보궁을 향해 간다. 내 희망과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마음속에 깃든 소란스러움을 다 지우고 싶다는 것이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온갖 욕망을 잠시라도 저 아래 상원사 쯤에 맡겨두고 싶다.
 
그러나 속절없이 내리는 비가 적멸에 대한 내 간곡한 희망을 자꾸만 훼방놓는다. 모든 사념들을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게 한다. 적멸보궁에 이르면 이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여의게 될까. 지나면서 보니, 숲 곳곳에는 수북하게 나뭇잎들이 쌓여 있다.
 
나뭇잎들은 가지각색으로 물들어 있다. 빨갛게 물든 나뭇잎도 있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도 있고, 본래 제 색깔인 파란색을 지닌 나뭇잎도 있다. 저 잎들은 살아서 나무의 욕망을 구현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젠 하나 둘 땅으로 떨어져 질서 있게 퇴각하고 있다. 소리 없는 나뭇잎의 적멸이 아름답다.
 
적멸보궁은 중대 사자암과 비로봉의 중간, 우뚝 솟은 봉우리에 좌정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보니 적멸보궁이 자리한 지형이 약간 둥글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가?

적멸보궁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금 바라보는 이 전각은 최근에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불상을 모시는 좌대엔 붉은 방석인 좌복만이 덜렁 올려져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으니 그 이상의 고귀한 불상이 어디 있겠는가.
 
일연의 <삼국유사>와 민지의 '오대불궁산중명당' 사이의 괴리
 
밖으로 나와 뒤꼍으로 가니 스님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좌정하고 앉아 기도하고 있다. 언덕 위에는 탑 모양이 새겨진 사리탑비가 서 있다.
 
이곳에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은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 하편에 실린 고려시대 문신인 민지(1248~1326)가 쓴 '오대불궁산중명당'이다. 거기에 자장율사가 중대 지로봉에 불뇌와 정골을 모신 뒤로 상서로운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쓰기를 자장이 모셔온 사리를 황룡사 9층탑과 통도사 계단, 대화사 탑에 분안했다고 했다. 일연이 입적한 것은 1289년의 일이며, 민지가 '오대불궁산중명당'이란 글을 쓴 것은 1307년이다. 그렇다면, 일연의 사후 20년 사이에 사리를 분안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분안했다면 어느 곳에 있던 사리를 나눠 이곳에다 안치했다는 것인가?  
 
저곳에 사리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 적멸보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징이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돼 버렸다.
 
열 걸음에 한번 쉬고 하면서 중대에 오르니
 
 
<산중일기>의 작자인 조선시대 선비 정시한이 이 적멸보궁에 들른 것은 1687년 10월 11일(음력)이었다.

다시 몇 리를 내려와 시내를 따라가니 폭포와 맑은 못에 볼 만한 곳이 많았다. 소명묘를 지나 중대에 오르니, 산이 험하고 길이 희미해 있는 힘을 다해 다릴 잡고 오름에 기진맥진하여 땀이 온몸을 적셨다. 열 걸음에 한번 쉬고 하면서 중대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자세히 구경할 수 없었고, 법당에 큰 글씨로 적멸보궁 넉 자가 씌어 있었는데 바로 개성부 사람 홍명기가 아홉 살 때 쓴 것이었다. 홍명기는 현재 나이 스물아홉 살로 개성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암자 건물은 채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려 넣어 다른 절들과는 달랐고, 인물과 새, 짐승, 초목 등의 형상을 사방 벽과 천정에 그려놓아 공교하기 그지없었으니, 바로 색름 수좌가 중창한 것이다. 색름은 성정의 제자이고 의규는 성름의 제자라 하였다. 암자 뒤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았는데 바로 석가불이 두개골을 안치한 곳이라 하였다. 암자는 터가 반듯하고 산세가 옹호하고 있었으나 혈이 풍후하지 못하고 안산이 자못 멀었다. - 정시한 (1625 ~ 1707)의 <산중일기> 중 1687년 10월 11일치
 
노구를 이끌고 숨을 할딱이며 산을 오르는 정시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시한보다 조금 뒤 세상에 나온 윤선거(1610~69)라는 사람의 시문집에도 적멸보궁에 대해 쓴 기문이 있다. 거기에 "내불치금상 지설불영 난삽잡색지화이기((內不置金像只設佛影 亂揷雜色紙花而已)"라 썼다. 이로 미루어 당시 적멸보궁 불단 위에는 불화와 각색의 종이꽃이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적멸보궁엔 적멸이 깃들 자리가 없었다
 
형형색색의 등이 적멸보궁 마당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입구 계단에 걸린 현수막은 아직 멀었다는 듯 '중대 비로전 목각탱 개금 불사'에 대한 동참을 목놓아 외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1691~1756)가 팔도를 암행하던 중 이 적멸보궁에 들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선 "스님들이 일도 않고 좋은 기와집에서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라고 촌평했다는 일화가 있다. 내가 보기에 박문수의 말은 일부 타락한 승가에 견주어 마치 전체가 그러는 양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이 '불사'를 좋지 않게 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룩하려면 얼마간 외로워야 한다. 번잡스럽지 않아야 하고, 의연해야 한다. 비루한 것은 세속의 욕망에 자꾸만 기웃거리기 때문이지, 결코 초라한 전각 때문이 아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더니, 이 적멸보궁에는 사무치도록 도달하고 싶은 적멸이 없다. 욕망과의 단절도, 빗소리를 비롯한 온갖 세상 소리와의 뼈 아픈 단절이 없구나. 쓸쓸한 마음올 부여안고 적멸보궁 계단을 내려온다. 김명리 시인이 왜 오대산 중대에서 적멸보궁을 보지 못했다고 썼는지 이제야 알겠다.

오대산 중대에 이르러서도 보지 못한 적멸보궁을 
여기 와서 본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삐걱대는 맨 뼈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 
적멸 
  
생각나면 들러서 성심((誠心)을 다하여 목청껏 진설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저 소리의 고요한 일가친척들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塔身)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텅 빈 물상좌대 위,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 
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 
  
밤 내린 장항리, 
폐사지 자욱한 달빛 진신사리여!
 
- 김명리 시 '적멸의 즐거움' 전문  

시인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적멸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나 보다.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폐사지에 가서야 비로소 적멸의 즐거움을 맛보았다니 말이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온 젊은 승려와 나란히 가면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그 스님은 지금 만행 중이라 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거쳐서 여기에 왔다는 그는 저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통도사에 있다는 스님과 중대 사자암에서 작별했다. 내게 "통도사도 다녀가세요"라고 인사한다.
 
그와 헤어지고 나자, 마음속으로 짧은 적막이 기어든다. 도대체 이런 적막을 몇천 번이나 겪어야 적멸에 이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오대산 적멸보궁은 지난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오대산 , #적멸보궁 , #가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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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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